지난 5월25일. 아이폰을 제조하는 홍콩의 폭스콘 회사 근처에서 일부 시위대가 아이폰을 그려놓은 종이를 불태우고 있다. |
뉴미디어 종합 정보 시스템 회사인 애플만큼 초연하면서도 강력한 회사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이 회사의 창시자이자 현 최고경영자인 스티브 잡스, 전제군주적이고 지금까지 몇 번이나 중병에 걸려 쇠약해지기도 했던 이 남자는 이제 우리가 어떤 물건을 구입해야 할지 결정하는 데에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 우리 삶의 방식 자체를 규정하고 있다.
그날은 매우 더웠다. 스탠퍼드대의 스타디움에는 한 점의 그늘도 없었고 학생들은 술에 취해 멍청한 미소를 짓거나 킥킥대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들 앞에 서방세계의 지배자가 고해를 하기 위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한입 깨문 사과의 로고로 알아볼 수 있는 그의 제품들은 현대인의 삶을 더욱 간편하게 할 수 있다고 인류가 믿기 때문에 소유하려는 물건이다. 아니 그 이상으로, 현대인의 삶이 아예 이 제품의 소유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인지 모른다. 하지만 지배자는 그 자신에 관해서는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개는 말이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가 내성적이라고 말한다. 그는 뭔가 팔아먹을 것, 그러니까 새 전화기(아이폰)나 납작한 판 모양의 새 기계(아이패드) 혹은 새로운 광고 플랫폼(아이애드)이 있을 때에만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뭔가 말을 한다. 아니면 1·4분기에 30억7천만달러를 달성해 전년보다 90% 이상 증가된 새로운 수익 기록을 발표할 때에만 입을 연다는 것이다.
그 외의 경우에는 그는 입을 다물고 주변 모든 사람에게도 침묵을 요구한다. 도대체 6월의 그날 스탠퍼드대에서 그를 움직이게 한 것이 무엇인지, 그가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에 관해 이야기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직 그날 그곳에서 단 한 번 벌어진 일이었다.
단지 세 가지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서 “대단한 것은 아니다”라고 잡스는 입을 열었다.
대단하지 않은 세 가지 이야기
첫 번째 이야기는 전환점들의 연결에 대해서라고 말했다. 잡스는 어머니가 어떻게 그를 포기했는지, 자신이 어떻게 입양됐고, 어떻게 학업을 중단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한 친구를 발견하고 아이디어를 가지게 될 때까지 수프 한 그릇을 얻어먹기 위해 몇 마일이나 되는 길을 어떻게 걸어가야 했는지 말했다. 인생의 전환점은 언제나 뒤돌아볼 때에야 연결할 수 있는 것으로, 우리 모두 언젠가 이 전환점이 하나의 그림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것을, 직관을 그리고 운명을 믿어야만 한다고 잡스는 말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사랑과 상실에 관한 것이었다. 잡스는 스무 살이 되었을 때 그의 인생의 역작인 애플을 찾아냈다. 그리고 서른 살이 되었을 때 그 회사에서 해고됐지만 여전히 사랑했기에 계속 컴퓨터 분야에서 일했다며 “가끔 인생에서 장애물에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여러분의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뛰어난 성과를 이루는 단 하나의 방법은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라고 학생들에게 말했다.
이것은 시(詩)인가? 아니면 미학? 그것도 아니라면 그냥 ‘개똥철학’일까? 세 번째 이야기는 삶과 죽음에 관한 것이었다. 그에 관해서는 나중에 언급할 것이다.
스티브 잡스를 묘사하는 말은 많다. ‘구루’ ‘천재’ ‘메시아’뿐 아니라 ‘독재자’ ‘인간 착취자’도 있다. 잡스를 ‘악마’ ‘사이코패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 악명 역시 그에게 걸맞다는 사실은 그의 세계로 들어선 순간 이해하게 된다. 애플, 한때는 단순한 컴퓨터 회사였지만 오늘날에는 가전제품 계통의 세계적인 강자로 부상한 이 회사는 그 강력함에 비해 어이없을 정도의 약점도 지녔다.
스티브 잡스라는 남자는 주류가 된 브랜드를 만들어냈다. 애플은 현재 세계의 온라인 음악 시장을 지배하고 있으며, 뮤직 플레이어와 하이테크 전화기 시장을 정복하고 있다. 지난 4·4분기에 애플은 아이폰 875만 개를 판매했다. 전화기와 노트북 사이에 위치한 아이패드는 미국에서는 열광적인 환영을, 독일에서는 열광적인 기대를 받고 있다. 아이패드는 미디어와 도서 시장에 태풍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제품으로, 터치 스크린을 장착하고 있어 사용자가 손가락으로 누르거나 원을 그리는 등 가장 원초적인 동작으로 이 컴퓨터 시대에서 아마도 최고로 정교한 기술을 제어할 수 있게 한다.
애플, 언제나 초연하고 얽매임이 없어 보이는 이 브랜드는 아마도 지난 수십 년간 광신적 추종자를 가졌던,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회사일 것이다. 추종자 그룹은 한두 명의 열광적인 팬이 아니라 애플을 지지하는 수백만 명이다. <뉴욕매거진>은 잡스를 ‘iGod’이라는 문구와 함께 표지 인물로 선정했고, 애플이 아이패드를 발표했을 때 <이코노미스트>는 그를 예수 아이콘으로 나타냈다. 역설적인 표현이었을까? 약간은 그렇다고 볼 수 있다.
이 모든 광기는 디자인과 많은 관계가 있다. 애플의 디자인은 소박하고 단순하며 타협이 없다. 이는 용기가 필요한 문제다. 애플처럼 거대한 규모로 제한 없이 아이디어를 내는 회사는 많지 않다. 애플처럼 자사의 원칙을 자주,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바꾸는 회사도 없을 것이다.
잡스는 지금까지 져본 일이 없는 상대가 도사리는 경기장에 즐겨 들어선다. 그리고 가끔은 새로운 업계를 만들어냄과 동시에 그 업계를 독점한다.
어떤 사람들은 아이패드가 책이나 잡지, 신문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인터넷 서핑을 할 수 있게 크기만 키운 아이폰의 복사품일 뿐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은 바로 그 점 때문에 아이패드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싶어하는 미래를 위한 기계라고 말한다. 아이패드는 패시브 컴퓨터로, 이 제품의 의미는 문화상품 소비에 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시대, 그리고 우리가 그 시대를 어떻게 살고 싶어하는지에 관련돼 있다. 사무실에는 아이맥(iMac), 이동 중에는 맥북(MacBook), 조깅을 할 때에는 아이포드(iPod), 교육을 위해서는 아이패드(iPad) 그리고 영원히 청춘이고 싶어하는 모든 이와의 연결을 위해서는 아이폰(iPhone)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21세기 개인의 삶을 이와 같이 보고 또 스스로 이렇게 보이고 싶어하는 것 같다. 이 모든 것이 55살의 스티브 잡스를 ‘21세기 철학자’로 만드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 검은 스웨터에 청바지를 입고, 넓은 이마에 수염을 기르고 은테 안경을 쓴 이 유혹자는 우리가 어떻게 살고 싶어하는지 결정한다. 그는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을 규정하고 그것이 우리가 가지고 싶어하는 것이라고 믿게 한다. 그는 대중의 구매 행태를 변화시켰고 그를 통해 삶의 방식, 즉 문화를 변화시켰다. 회사의 성공을 기반으로 그는 이데올로기와 그가 만든 컴퓨터에 재생되는 콘텐츠를 검열할 권리를 이끌어냈다. 애플은 세상에서 제일 영향력 있는 회사가 돼가는 중일까? i-권력자?
애플사를 이해하려면 스티브 잡스를 이해해야만 한다. 애플은 그의 인생의 역작이며 이 회사는 그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있다. 잡스에게는 승리자와 패배자, 천재가 아니면 얼간이만 존재한다. 그는 육식을 하는 사람을 싫어하고 제품은 “미친 듯이 대단”하거나 “쓰레기”라고 평가한다. 직원들은 오늘은 천재라고 불리지만 내일 당장 ‘천하의 바보 멍청이’가 될 수 있고, 오늘은 꼭 필요한 인재이지만 내일 바로 해고당할 수 있다. 애플 직원들은 잡스의 지배 원리를 ‘영웅-쓰레기 롤러코스터’라고 칭한다.
애플, 동시에 스티브 잡스의 이야기인 이 글은 낡은 건물에서 시작된 그 시초부터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회사가 된 미래까지 시대에 따라 목격자 6명의 증언을 기초로 한다.
I. 창립자
애플사의 이야기는 샌프란시스코 남부에 위치한 로스앨토스의 차고에서 시작한다. 1976년 어느 날 잡스 일가의 차고에서 스티브 잡스는 친구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컴퓨터의 프로토 타입을 만들고 있었다.
그들이 서로 알게 된 것은 5년 전이었다. 둘 다 전자제품광이었고, 대학을 중퇴했고, 아웃사이더였다. 나중에 사람들은 이러한 타입을 ‘너드’(Nerds)라고 칭하게 될 것이다. 아마도 이 창고에 있던 두 청년이 최초의 너드였을지 모른다. 그들은 비틀스와 밥 딜런의 음악을 들으면서 공짜 통화를 하기 위한 위법 장치를 만들었다. 비디오게임도 만들었다. 그중 ‘브레이크아웃’(Breakout)이란 게임은 비디오게임 회사 아타리의 최초 성공작이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더욱 엄청난 것, 모든 이를 위한, 누구나 부담 없이 구입하고 사용할 수 있는 개인 컴퓨터를 꿈꿨다. 그들의 꿈에는 두 가지 차이가 있었다. 워즈니악은 그 기계를 만드는 것을 꿈꾸고, 잡스는 그것을 파는 것을 꿈꾸고 있었다.
당시 컴퓨터는 돈 많은 회사와 미 중앙정보국(CIA)을 위한 것으로, 가격이 최소 10만달러에 달하는 거대한 기계였다. 하지만 워즈니악은 13살에 이미 첫 번째 컴퓨터를 만들었다. 이 재능은 1975년 6월 어느 일요일 저녁 그가 2개의 케이블로 자신의 프로토 타입 기계와 모니터, 키보드를 연결한 순간에 이미 최초의 혁명을 이루었다.
“그게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 나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라고 말하며 워즈니악은 웃었다. 그는 자서전에 그 순간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것은 사상 최초로 인간이 키보드에 알파벳을 타이핑하면서 동시에 자기 앞에 높인 컴퓨터 모니터에 그 알파벳이 나타나는 것을 본 순간이었다.”
1976년 봄, 한 명의 스티브(워즈니악)가 다른 스티브(잡스)에게 개인용 컴퓨터의 설계도를 보여주었다. 타자기만한 크기의 기계로, 적은 비용으로 만들어 훨씬 비싸게 팔 수 있는 물건이었다. 잡스는 워즈니악에게 박수를 보내고 계산을 해봤다. 그리고 워즈니악의 기억이 맞다면 이 순간 잡스는 그들 앞에 펼쳐진 가능성을 알았다. 애플의 탄생 순간이었다. 새 컴퓨터의 부품을 구입하기 위해 잡스는 자신의 폴크스바겐 자동차를 1500달러에 팔아치웠다. 그리고 워즈니악에게 그가 다니던 휼렛패커드사를 그만두라고 설득했다.
애플I은 회로 기판과 몇십 개의 칩이 든 나무 상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물건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다른 세계로 들어서는 첫걸음이었다. 그리고 잡스는 그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스티브는 회로를 설계하지도, 코드를 입력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 혼자서는 컴퓨터를 팔아볼 생각을 절대로 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건 스티브의 아이디어였어요”라고 워즈니악은 말한다.
1976년 4월1일 두 친구는 애플컴퓨터사를 창립했다. 애플I을 대량 생산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당시 그들은 몇 주간이나 제대로 잠을 자지 않고 일했다. 잡스는 신중하게 직원을 고용했다. 언제나 고용한 직원이 할 수 있는 일의 양보다 해야 할 일이 더 많아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잡스는 투자자를 찾아내고 제품 판매 루트를 조직했다.
1977년 6월 애플II가 시장에 나타났다. 가격은 키보드를 포함해 1298달러로, 모니터는 별도로 구매해야 했다. 이 물건이야말로 전세계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고 200만 대 이상이 팔려나간 사상 최초의 개인 컴퓨터이자 그 끝이 존재하지 않는 역사의 시작이었다. 워즈니악은 자신의 발명품을 시리즈로 제작했다. 그가 저렴한 플로피디스크와 컬러 그래픽을 만들어내는 동안, 잡스는 계속 판매 혁명을 일으켰다. 1980년 애플은 주식을 공개 상장했고, 워즈니악과 잡스는 백만장자이자 스타가 되었다.
애플은 “철학, 미래 그리고 반문화 운동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는 서로 닮은 두 명의 가장 친한 친구에 의해 만들어진” 회사라고 워즈니악은 2010년 1월에 언급했다.
“우리가 만드는 모든 것이 금으로 변했습니다. 무엇을 만들든지 전부 세계 최초이던 때였습니다”라고 워즈니악은 말했다. 하지만 그는 1985년 애플사를 떠났다. “잡스는 그 제품들을 한 회사의 미래로 보았지만 제게 그 제품들은 인생 전부였습니다. 전 더 이상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지 않았어요.” 그 뒤 워즈니악은 록 콘서트를 기획하고, 학교에 컴퓨터를 기부하고 또 반복해서 새로운 회사를 설립했다. 그 회사들은 세계를 뒤흔들지는 못했다. 그에게 악마적인 면이 부족한 것일까? 냉혹함이? 워즈니악에게는 좀더 나쁜 면이 필요한 것일까?
잡스와 워즈니악은 서로 자주 만나지 않는다. 그들 사이에 처음 균열이 발생한 것은 1984년이었다. 그때 워즈니악은 잡스가 그들의 첫 번째 공동 프로젝트인 아타리의 비디오게임 가격으로 5천달러를 받았다는 말을 들었다. 그 게임을 팔 당시 잡스는 700달러를 받았다고 그에게 말했고, 두 친구는 이 700달러를 서로 나눠 가진 것이다.
그것은 사기였을까? 배신? 그게 아니라면 계산 착오?
25년 뒤인 지금 워즈니악은 잡스보다는 애플에 애착을 가지고 있다. 그는 아직도 애플의 직원이고 실리콘밸리의 로스개토스에 살고 있다. “잡스는 그 시절과 똑같은 방식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존재하는 기술을 살펴보고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무엇을 원할지, 그리고 애플이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최고의 지름길을 찾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합니다”라고 워즈니악은 말한다.
II. 마법사
1979년 애플사는 새로운 컴퓨터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스티브 잡스는 곧 개발 부서의 책임자가 되었고, 지금까지 전례가 없던 것을 만들어내기를 원했다. 매킨토시는 개발자가 세상을 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질 것이었다. “우리는 계층과 구조를 경멸했습니다. 1970년대에 컴퓨터는 권위의 도구였어요. 우리는 컴퓨터를 모두에게 개방된 해방의 도구로 만들려 했습니다”라고 앤디 헤르츠펠드는 말했다.
헤르츠펠드는 매킨토시 개발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1979년 애플사 최초의 직원 중 하나로 입사했다. 그의 명함에는 ‘소프트웨어 마법사’라고 적혀 있다. 헤르츠펠드는 이 회사를 좋아하고, 그 시절이 자신의 전성기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얼마나 놀라운 시기였던가! 하지만 동시에 다른 면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헤르츠펠드는 잡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극단적일 정도로 복수심이 강합니다. 모든 사람이, 특히 직원들이 그를 무서워했어요. 누가 나에게 잡스를 한마디로 설명하란다면 ‘제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잡스의 세계관은 그가 만든 규칙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 자신만 제외하고요.”
헤르츠펠드는 혁명가처럼 살고 있지 않다. 그는 팰러앨토의 조용하고 나무가 우거진 거리에 큰 집을 가졌고 땅딸막한 몸집에 늘어진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우리는 세계를 변화시키려 했습니다.” 매킨토시의 탄생은 단순히 새로운 제품 시리즈의 시작이 아니라 “오르가슴”과도 같았다고 헤르츠펠드는 말했다. 매킨토시는 그래픽 인터페이스를 기반으로 아이콘과 겹쳐져 열리는 윈도가 등장한 최초의 대량생산 PC였다. 그리고 이 컴퓨터에는 마우스가 달려 있었다.
“미래에 세상의 모든 컴퓨터가 그런 형태를 띨 것이라는 확신이 우리에게는 있었습니다.” 몇 년 뒤 스티브 잡스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리고 앤디 헤르츠필드는 “애플은 경제적으로 많은 이득을 내는 제품이나 기술적으로 뛰어난 제품을 만들어내고 싶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애플 제품은 그 자체로 훌륭한 것이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완벽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매킨토시는 1984년 1월22일 슈퍼볼 경기 중계방송 중에 30초짜리 광고로 소개됐다. 이 광고는 영화감독 리들리 스콧이 만든 것으로, 필름에는 끝없이 길게 늘어서 있는 노동자와 감정 없는 군대가 나오고,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빅 브러더’ 같은 존재가 그들에게 채찍질을 한다. 이 군대는 당시 아직 애플의 라이벌이던 IBM을 의미했다. 한 젊은 여성이 화면으로 뛰어 들어오고 그녀의 뒤를 무장한 경찰들이 쫓아온다. 그녀는 빅 브러더를 깨부수고 노예가 된 대중을 구원한다. 이 여인은 애플이다. 그리고 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1월24일 애플이 매킨토시를 출시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왜 1984년이 소설 <1984> 같이 되지 않을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거의 8천만 명에 이르는 시청자가 그 광고에 매료됐고 또 혼란스러워했다. 이 TV 광고는 광고 전문가들 사이에서 이 시대 최고의 광고라고 인정받고 있다. 애플은 이 광고로 거의 모든 광고인을 애플의 포로로 만들었고, 이들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애플의 포로로 남아 있을 것이다.
애플은 많은 대기업이 성공하기 힘든 일을 해냈다. 제품에 감성을 부여하고, 그것을 가치를 통해 강화해 제품 자체를 가치 있게 만든 것이다. 애플은 유혹한다. 매킨토시를 구입하는 사람은 젊고 창의적이며 혁신적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쿨하다라고.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는 나중에 애플의 슬로건이 되었다.
이 점이 바로 애플이 코카콜라나 아디다스 같은 다른 글로벌 브랜드와 차별되는 것이다. “애플은 예술적 가치에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이 회사의 본질입니다. 다른 어느 회사에서 이와 같은 일이 가능한가요?”라고 헤르츠펠드는 묻는다.
III. 아티스트
그 집은 마치 애플 컴퓨터처럼 생긴 집이었다. 넓고 따스한 하얀 집. 집 밖에는 올리브나무와 야자나무가 서 있고, 집 안에는 하얀 벽과 크롬, 피아노, 중국 차 도구 그리고 마이센 도자기가 있었다.
그 집에는 허리 수술로 몸이 불편하더라도 여전히 옷을 입는 법과 우아하게 움직이는 법을 아는 한 남자가 살고 있었다. 남자는 청바지와 자수가 놓인 푸른 셔츠를 입고, 수염을 기르고 덥수룩한 회색 머리를 가졌다. 하르트무트 에슬링거는 독일어에 영어를 섞어 썼다. 그는 몇십 년간 캘리포니아에서 살고 있다. 에슬링거 역시 그의 세계에서 대단한 인물이다. 그는 디자이너이다. 1969년 그는 슈바르츠발트 지방에 위치한 알텐슈타익시의 한 차고에서 ‘프로그 디자인’(Frog Design)사를 설립했다.
“디자인은 단순한 포장이 아닙니다. 디자인은 생각을 하는 방식입니다. 디자인은 제품 전체에 대한 진지한 고찰입니다”라고 이전에 에슬링거가 말한 적이 있다. 며칠 뒤 스티브 잡스는 “디자인은 단순히 제품의 외형이나 촉감만이 아닙니다. 디자인은 기능하는 방식입니다”라고 말했다. “잡스는 가끔 남이 말하는 걸 잘 들었다가 나중에 그것을 자신의 말로 변화시켜 내놓곤 하지요.” 에슬링거는 이렇게 말하며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그는 잡스에게 감탄하고 있고, 무엇보다 그의 대담함을 높이 사고 있다.
1970년대 에슬링거는 독일 회사 베가의 TV 수상기 플라스틱 케이스를 디자인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소니는 먼저 베가를 합병하고 나중에는 하르트무트 에슬링거를 영입했다. 그 뒤 수십 년간 에슬링거는 소니를 위해 TV를 디자인하고, 루프트한자 디자인을 재설계하고 비행기의 창문을 설계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왜 컴퓨터가 그렇게 흉측해야만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
컴퓨터는 친구가 아닌 적처럼 보였고, 남자만을 위한 공구 같은 느낌이었다. 에슬링거는 이렇게 말한다. “모두 새로운 프로세서와 점점 작아지는 칩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도 디자인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어요. 왜 사무실이 감옥처럼 보이는지, 왜 사람들이 이 회색 물체를 집에 두고 싶어하지 않는지 아무도 의문을 품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케이블과 소음. 모든 관리자가 언제나 하는 일만 했습니다. 용기는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용기는 완벽에 도달할 가능성에 대한 어린아이와 같은 신념입니다.”
잡스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 디자인을 위해 에슬링거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에슬링거는 “때때로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직 알지 못하다”고 믿었다. 그는 또한 “좋은 디자인은 도발과 친숙함 사이, 그리고 기발함과 고루함 사이의 정확한 균형”을 찾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잡스에게 다른 것, 즉 하얀색 컴퓨터를 제안했다: ‘캘리포니아 화이트’라고 그는 명명했다. “컴퓨터 업계는 인간이 물건에 감성적 애착을 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문장 역시 잡스가 며칠 뒤 회의에서 그대로 따라 읊어졌다.
“미치도록 위대하게!”(Be insanely great!), 이것이 잡스의 명령이었다. 그리고 프로그사 직원들은 수시로 아티스트와 엔지니어로 변신하면서 프로토 타입 모델을 설계했고 잡스는 그것을 지원해주었다. 프로그사는 매달 20만달러를 지급받았고, 이는 보수적인 실리콘밸리에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을 위해 쓰기에는 아주 많은 돈이었다.
25년 뒤 에슬링거와 잡스의 협력관계보다 디자이너와 광고인들의 극찬을 받는 관계는 없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이해하고, 삶을 더 쉽고 즐겁게 만드는 물건을 개발하는 것. 그것이 애플의 비밀입니다”라고 함부르크에 위치한 광고 에이전시 숄츠앤드프렌즈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수제 바렛은 말한다. 다른 컴퓨터 회사들이 기술 발전에 따라 움직이는 동안 “애플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고 유용한 물건을 만드는 데 힘써왔습니다. 그를 통해 애플 제품들은 새로운 라이프스타일, 즉 디자인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디지털 라이프스타일’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라고 그녀는 말했다.
애플의 기계들은 단순하고 기능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애플 제품은 광고인들이 이른바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라고 칭하는 종류의 물품이 되었다. 수많은 애플 제품을 장식하는 ‘i’ 로고는 한때 ‘인터넷’을 의미했지만 오늘날에는 ‘나’를 의미한다. 자아실현 또는 그에 대한 환상에 관한 것이다. “실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예술작품일 수 없을까요?”라고 현재는 빈대학의 교수이자 책을 쓰는 에슬링거가 되물었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고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 이러한 글귀를 에슬링거는 자신의 책에 써넣고 있다.
2007년 애플은 자사의 휴대전화를 시장에 내놓았다. 오래전부터 다른 회사들이 단단히 자리잡고 있는 낯선 시장이었다. 아이폰은 아이팟과 동일한 아이디어를 따랐다. 아이폰은 이미 시장에 나와 있는 모든 ‘스마트폰’보다 가늘고 심플하며 손에 쥐어지는 느낌이 좋았다. 이 휴대전화는 단순히 우리에게 필요한 제품이 아니라, 우리가 이 제품을 절실히 원했다.
아이폰은 버튼 수가 적은 대신에 민감한 터치스크린을 장착해, 사람들은 이 휴대전화로 PC에서와 마찬가지로 인터넷 서핑을 할 수 있다. 전세계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만든 18만5천여 개의 다양한 애플리케이션, 줄여서 ‘앱스’(Apps)는 애플 아이튠스 스토어(Apple iTunes Store)에서 판매된다. 다음에는 애플의 플랫폼 아이애드(iAd)를 통해 광고가 게재될 것이다.
에슬링거가 디자인한 첫 번째 컴퓨터 애플IIc는 당시 쿠퍼티노에 있던 잡스의 사무실에서 소개됐다. 25개 모델이었고 모두 하얀색이었다. 잡스는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오 이런, 이게 제대로 작동하길 바랄 뿐입니다. 저는 확신이 없군요.” 판매 첫날 애플은 5만 대를 팔았다. 1984년 4월24일이었다. 그리고 오늘날 애플IIc는 뉴욕의 휘트니미술관에 전시돼 있다.
지난 4월8일 미국 애플 본사에서 열린 특별설명회에서 아이패드를 선보이는 스티브 잡스. |
IV. 적
그러나 잡스가 그의 추종자들이 칭송하는 것처럼 완벽한 인물이었던 적은 단 한순간도 없다. 그리고 그가 언제나 구글의 사장인 에릭 슈미트가 칭한 것처럼 “이 세계 최고의 CEO”는 아니었다. 심지어 그는 한동안 CEO가 아니었던 적도 있다.
1980년 주식이 상장되고 확장이 시작된 뒤, 애플 이사회는 까다로운 잡스를 감독하고 그에게 글로벌 기업을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지 가르쳐줄 경험이 많고 능숙한 매니저를 CEO로 영입하기를 바랐다.
잡스는 이 결정에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CEO 선출 때 자신의 의견이 반영되기를 원했다. 당시 잡스가 영입하기 원한 사람은 펩시콜라의 CEO이자 마케팅 전문가인, 그리고 컴퓨터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던 존 스컬리였다. 18개월 동안 잡스는 스컬리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잡스는 스컬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여생 동안 계속 설탕물이나 팔고 싶은 건가요? 세계를 변화시킬 기회를 가지고 싶지 않습니까?”
스컬리는 승낙했다. 잡스는 스컬리에게 호감을 가졌다. 언론은 두 사람을 “다이내믹 듀오”라고 불렀다. 그러나 2년 뒤 스컬리와 잡스 사이에는 불화가 생겼다. 두 사람 중 힘을 가지고 있는 게 누구인가를 놓고 대결이 벌어졌던 것이다. 창립자 아니면 현재 CEO? 비전을 가진 기획자 아니면 성실한 관리자? 이사회는 스컬리를 선택했다. 1985년 가을 잡스는 그가 탄생시킨 아이이자 그의 인생이던 애플을 떠났다.
그리고 스컬리는 8년간 더 애플에 머물렀다.
“저를 CEO로 영입한 것은 큰 실수였다고 생각합니다.” 2010년 초 스컬리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뉴욕의 한 사무실에 있는 묵직한 회의용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그의 뒤에 있는 창문으로는 센트럴파크가 내려다보였다. “이사회가 스티브를 CEO로 선출하는 게 좋았을 겁니다.”
그는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저는 그냥 마케팅 담당 상임이사나 하는 게 좋았을 겁니다. 그랬으면 저와 잡스가 갈라질 일도 없었겠죠”라고 스컬리는 말했다.
그 뒤 잡스는 다시는 스컬리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도 이해합니다.” 맨해튼 거리를 내려다보며 앉아 있는 스컬리는 지친 듯 보였다. 71살의 사모펀드 회사 동업자이자 팜비치에 저택을 가진 이 남자는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 잡스의 호감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 괴로워했다.
스컬리는 자신이 “잡스처럼 기획을 하거나 미래를 꿰뚫어볼 수 있는” 능력이 부족했다고 말했다. 1993년 그 역시 애플을 떠나야만 했다. 회사는 궁지에 몰려 있었다. 아이디어도 없고 경영도 엉망인 상태에서 컴퓨터 세계의 새로운 스타인 마이크로소프트에 대항하기 힘들었다.
“다행히도 잡스가 돌아왔습니다.” 2010년 초 스컬리는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천재란 남들보다 20년 빠르게 먼 미래에 기준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스컬리는 말한다. “그는 아이팟과 아이폰으로 그 능력을 증명했어요. 그가 이제 다른 분야에서도 같은 일을 해내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올바른 평가다. 스티브 잡스의 진정한 능력은 사람들의 잠재적인 요구를 파악하고 아직 미숙한 아이디어의 가능성을 알아본 뒤, 그 아이디어에서 완벽한 제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가 워즈니악이 만든 퍼스널컴퓨터의 프로토 타입을 보았을 때도 그러했다. 그리고 애플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컴퓨터 제조회사가 되었다. 음반업계가 불법 파일 공유에 속수무책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애플은 세계 최대 온라인 음악 유통업체가 되었다. 그리고 모바일 산업계가 다수의 고객에게 휴대전화로 인터넷 서핑을 하지 못하게 했을 때 아이폰이 시장에 나타났다. 그 영향력은 너무나도 거대해 심지어 도이치텔레콤이나 AT&T와 같은 통신 대기업이 애플이 정한 가격에 따르고, 그들의 수익 중 많은 부분을 넘겨주고, 절대로 애플에 관해서 나쁜 말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해야 했다. 그 영향력은 독일에서 아이폰을 소개하는 프레젠테이션이 열렸을 때, 오직 잡스만 무대에 나서고 도이치텔레콤의 CEO 르네 오버만은 무대 아래에서 그냥 보기만 할 수밖에 없게 할 정도였다.
음반산업계 역시 잡스에게 화가 나 있다. 이것은 물론 비공식적이다. 음반 대기업들은 현재의 상황을 불쾌해했지만, 그들의 제품, 그들의 음악 가격을 결정하는 기업의 손아귀 안에서는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스티브 잡스를 통한 구원의 대가는 모든 자가 ‘제어의 포기’인 것이다.
V. 남성 심리 전문가
“스티브 잡스는 다른 모든 천재와 마찬가지예요. 누가 모차르트를 좋은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라고 파멜라 커윈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는 거칠거나 남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잡스는 비전을 가진 사람이에요. 다른 CEO들은 돈과 권력을 원하지만 그는 뛰어난 아이디어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에게는 뛰어난 기술을 탄생시키는 능력이 있어요. 일보 전진 따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잡스가 원하는 건 자기가 하는 일이 이 세상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거예요.”
커윈과 스티브 잡스가 처음 만난 1989년, 그녀는 픽사의 부사장이었고 잡스는 목적 없이 떠도는 한 남자였다.
“어쩌면 스티브는 어린 시절 높은 곳에서 떨어져 머리를 다쳤는지 몰라요. 그래서 뇌 속의 어느 부분,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은 사용하지 못하고 잠들어 있는 부분이 활성화된 거죠. 그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그는 현재 쿨한 것이 무엇인지 느끼지는 못하지만 어떤 것이 미래에 쿨한 것이 될지는 느끼죠. 그런 다음에 그는 직원들을 격려하고 재촉해요. 떠나는 사람도 많지만 최고의 인재들은 남습니다. 그는 최고의 인재들이 최고의 성과를 올리게 합니다. 최고가 아닌 것은 받아들이지 않을 거예요. 그에게는 자비도, 타협도 없습니다. 아이폰을 한번 보세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버튼이 더 필요하다거나 교체할 수 있는 충전지가 필요하다고 말했나요? 하지만 잡스는 ‘안 돼. 그건 사용자에게 불편해’라고 생각했죠. 물론 당시에도 그는 이 모든 선견지명을 가지고 있었어요.”
커윈은 스티브 잡스의 세계 속 중심부에 서 있는 몇 안 되는 여성 중 한 사람이다. 또한 잡스를 사색적으로 관찰하고, 그에 대해 그녀가 생각하는 바를 쇼크 상태에 빠지지 않은 채 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들은 잡스의 호감을 잃어버리는 것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이는 잡스가 그저 무심한 태도를 보이는 정도임에도 10년 넘게 그들이 아직도 그 일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부분이기도 하다.
버려진 많은 이들은 몇 년 뒤에도 여전히 후회하고 있다. 그들은 잡스가 그들을 성이 아닌 이름으로 부르는 것 이상을 바라지 않을지 모른다. 아니면 잡스가 그들에게 고함을 지르거나 하는 것 말이다. 스티브 잡스가 누군가와 ‘페이스 타임’(단독 면담 시간)을 갖고 의견을 들어주는 것은 그 사람에게 주어진 임무가 얼마나 중요한지 나타내주는 표식이다. 스티브 잡스가 누군가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은 그가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누군가를 성이 아닌 이름으로 부르고, 그 사람 또한 미스터 잡스를 ‘스티브’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은 그 직원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나타내준다.
애플 제국의 내부는 참으로 유치하게 돌아가고 있다. 파멜라 커윈 같은 여성은 지금까지 등장한 인물 중 유일한 어른으로 보인다. 이것은 어쩌면 그녀가 애플에서 일한 적이 없기 때문인지 모른다. 커윈은 애플이 아닌 잡스가 1986년 인수해 리뉴얼한 픽사의 직원이었다. 픽사는 1970년대 후반 조지 루카스 필름 제국의 일부로 설립된 회사로, 당시에는 아직 영화 역사상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스튜디오가 아니라 그저 캘리포니아에 널린 수백 개 신생 회사 중 하나였을 뿐이다. 픽사에는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재능이 있는 몇 명의 직원이 있었고, 그들은 파티와 맥주통과 스캔들 속에서 일에 치여 살았다.
3D 화면을 구성하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다. 그 일을 픽사는 할 수 있었고, 잡스는 그 가치를 알아보았다. “잡스가 픽사에 돈을 버리고 있다고 온 실리콘밸리가 말했죠. 그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걸 알아보았어요. 전 그걸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잡스는 조지 루카스에게 500만달러를 지급했고, 회사에 또 500만달러를 투자했다.
잡스는 창의적인 인재, 무엇보다 “왼쪽 뇌가 발달한”(커윈) 전략가들을 발탁했다. 잡스는 사실 소프트웨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 몰랐어요. 아마도 그것이 우리를 그로부터 보호했을 거예요”라고 커윈은 말한다. 당연히 그는 소리를 지르고, 벌을 주고, 변덕스러웠다. 하지만 잡스는 픽사의 판타지를 담당하는 존 라세터에게 일을 하게 해주었고, 그가 할 수 있는 한 도왔다.
그는 픽사의 능력을 디즈니에 팔았다. “그는 상어들과 수영할 수 있었지만 우리는 그게 불가능했죠. 그가 팔아먹을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잡스는 언제나 1천만달러를 요구했어요. 그게 1천만달러의 가치가 없을지라도 말이에요”라고 커윈은 말한다. 그는 몇 달간의 노력으로 만든 결과물을 파괴하기도 했다. 이 일은 그가 인텔과 거래할 때 서명을 하기 직전에 발생했다. 잡스는 폭발했고, 인텔사 임원들은 기분이 상한 채로 돌아갔다.
파멜라 커윈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다른 유명한 CEO들과 거래하는 데는 별 소질이 없어요. 그럴 때는 에고와 에고가 맞서게 되는데, 스티브는 절대로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거든요. 하지만 그가 프레젠테이션에서 청바지와 검은색 풀오버를 입고 마치 구세주처럼 나타나 고객에게 판매할 때는 화려한 쇼 스타가 되죠. 이때에는 거대한 에고가 방해되지 않거든요. 쇼 마스터에게는 거대한 에고가 필요하니까요.”
그는 픽사의 방향을 바꿔놓았다. 움직이는 화면은 쇼트 필름이 되고 극장 영화가 되었다. <토이 스토리>의 각본이 만들어지고 잡스는 주식 상장을 준비했다. “당시 온 실리콘밸리가 아직 1달러도 벌어들이지 못한 회사가 주식을 상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그것이 이루어졌고 <토이 스토리>가 만들어졌다. 몇 년 뒤 <니모를 찾아서>가 그 뒤를 이었다. ‘픽사 유치원’은 거대 기업이 되었고, 잡스와 함께 여행을 떠난 이들은 백만장자가 되었다.
그리고 잡스는 배웠다. 그는 모든 것을 흡수해서, 새로 구성하고, 아이디어를 확대시켰다. 그가 애플에 돌아왔을 때 가지고 온 것은 픽사의 아이디어들이었다. 움직이는 화면, 커뮤니케이션 형태의 네트워크화, 그리고 미디어. 픽사에서 잡스는 무엇이 가능한지를 알게 되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동영상과 음악을 구입할 수 있는 온라인 상점이 구상됐고, 음악과 동영상을 사용할 수 있는 인텔리전트 전화기와 미니 컴퓨터가 개발됐다. 모든 것이 단순하고 반듯해 보이고 간단하게 조작할 수 있어야 했다.
1996년 애플은 잡스의 회사 넥스트(NeXT)를 인수하고 잡스를 다시 복귀시켰다. 애플은 방향성이 없는 대기업이 돼 있었고 그 상태를 공개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애플에는 말을 하는 목소리가 너무 많았고, 그 때문에 진짜로 애플을 대표하는 목소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잡스는 그것을 염두에 두었고, 여기에서 이제는 전설이 된 애플의 ‘비밀 엄수’ 전통이 생겨났다.
“스티브는 이 목소리들을 없애고 애플을 대표하는 목소리를 단 하나만 남겨두려고 했어요. 자신의 목소리였죠”라고 아이튠스 개발에 참여한 직원이 이야기했다. 애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비밀 엄수 서약에 서명한다. 이 서약은 그들이 애플을 그만둔 뒤에도 몇 년간 계속 유효하다. 잡스가 이것을 아주 심각하게 요구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증명됐고, 애플은 소송에서 이겼다. 심지어 애플 직원들은 간행물마저 금지당했다. 그들은 자신의 연인에게조차 자신의 일에 대해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사실 그들 자신도 자기가 어떤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모든 제품 분야는 코드와 숫자와 알파벳이 부여돼 있다. 핵심 엔지니어조차 코드만을 알고 있고, 제품이 완성됐다 할지라도 그것을 설계한 사람들은 설계 도면은 알지만 디자인을 알지 못한다
쿠퍼티노의 캠퍼스는 최고 보안 구역이다.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현재 일하는 건물만의 코드 카드를 가지고 있다. 바로 옆 건물에도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예외는 스티브 잡스 한 명뿐이다. 그렇다고 그가 언제나 카드를 가지고 다니는 것은 아니다. 그를 제지하는 경비원이 있으면 그 경비원이 해고될 뿐이다.
언론미디어 정책을 말하자면 ‘통제광’이라는 한마디로 줄일 수 있다. 우호적이라고 증명된 비평가 리스트에 오르지 않은 매체와 애플이 대화하는 일은 드물다. 이러한 정책이 애플 신화를 확대시키고, 잡스가 믿는 바와 같이 애플의 엔지니어 한 사람이 술집에 새 아이폰을 두고 오기만 해도 시작되는 전세계적인 입소문, 즉 ‘버즈’(Buzz)를 강화한다는 것이 사실일지 모른다. 또 확실히 ‘애플 신도’들은 이러한 병적 폐쇄성을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고객과 공급업체, 정치가와 세계 언론의 물음에 공식 서한으로도 답변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일일까?
세상에는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는 수천 개 회사가 존재한다. 그런데 애플이 단 하나의 특정한 소프트웨어만 사용해야 한다고 결정하면 잡스는 수많은 오늘날의 ‘너드들’의 기반을 빼앗는 것이다. 애플은 이미 과거의 IBM 같은 존재가 된 것은 아닐까? 이런 회사가 위기에 처했을 때 힘이 돼줄 자가 있을까? 자신감은 언젠가는 자만심으로 변하는 것이 아닐까? 내부나 외부에서 좀더 어른답게, 다른 의견에 귀기울일 줄 알고 그에 답변도 하면서 합리적으로 소통하거나 고객을 진지하게 대하는 것이 이런 대기업을 더욱 강하게 만들지 않을까?
2008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애플은 전세계로 전체 전자우편을 보냈다. “모든 배송이 선물을 전달하는 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하도록 빨리 주문해달라”는 요청이 적혀 있었다. 하지만 독일 어린이들에게는 선물이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배송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알고 있었고, 애플에서 일하는 거의 모든 사람도 알고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지난 뒤 수천 명의 고객이 불만을 제기했지만 누구도 답변하지 않았다.
오래된 매킨토시 모델을 가진 사람이 디지털 사진을 인화한 앨범을 만들고 싶어할 경우, 그는 애플도 이미 알고 있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 컴퓨터는 일단 앨범을 생성하는데 이 과정에 약 20분 정도가 소요된다. 그 다음 컴퓨터는 새로운 프로그램 버전인 ‘아이라이프’(iLife)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띄운다. 이 프로그램의 가격은 80달러다. 사용자가 아이라이프를 주문해 다운로드한 뒤 설치하려면 마지막 클릭 후 “아이라이프를 이 컴퓨터에 설치할 수 없다”는 메시지가 뜬다. 프로그램 반환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잡스 같은 사람에게 중요한 일일까?
스티브 잡스가 애플에서 다시 일하기 시작할 때, 그는 광고 에이전시 TBWA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켄 시걸을 고용했다. 그는 시걸에게 “애플이 세상 사람들에게 잊혀졌고, 이 때문에 이제 회사의 정신을 다시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석 달 뒤 TV 광고가 방송됐다. 광고에는 알버트 아인슈타인과 마틴 루서 킹의 모습이 나오고 이들이 애플과 같은 것을 구현한다고 말하며 ‘Think different’라는 슬로건을 보여준다.
“스티브는 언제나 ‘우리는 낡은 사슬을 벗어버려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회사 전체를 걸 정도로 확신에 차 있었지요. 스티브가 무엇인가를 진심으로 원하면 그는 무자비하고 완고합니다”라고 시걸은 말한다.
1998년 8월 아이맥(iMac)이 출시됐다. 그 반향은 어마어마했다. 매출도 좋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애플 지지자들이 열광했다는 것이다. ‘애플 컬트’ 문화가 되살아난 것이다. ‘Think different’라는 광고 아이디어는 소비자를, 당시 주류였던 마이크로소프트에 대항하고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는 혁명의 동지로 만들었다.
이것은 이미지일 뿐이고, 이 이미지는 거짓을 말하고 있다. 스티브 잡스는 더 이상 혁명가가 아니다. 그는 독과점과 시장지배를 행하고 있다. 혁명 뒤에는 항상 다음 지배자가 나타나는 법이다.
지금까지 확인한 결과에 따르면 그는 절대로 온화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빌 게이츠를 싫어한다. 그는 병에 들었었고 어쩌면 지금도 병들어 있는지 모른다. 그는 건강하고 젊은 자기 직원들을 싫어한다. 사실이야 어쨌든 최소한 젊고 건강한 애플 직원들은 그렇게 이야기한다.
그의 친부모는 시리아인 정치학자인 압둘파타 잔달리와 미국 여성 조앤 시벨이다. 그는 폴 잡스와 클라라 잡스 부부에게 입양돼 태평양 연안의 마운틴뷰와 로스앨토스에서 자라났다. 서른 살 즈음에 스티브 폴 잡스는 진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친여동생인 모나를 찾기 시작했고, 그녀를 찾아내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모나는 <멋진 녀석>(A Regular Guy)이라는 소설을 출간했다. 이 소설은 ‘너무 바빠서 변기에 물 내릴 틈도 없는’ 백만장자에 관한 이야기로, 소설 안에서 이 남자는 전 여자친구들이 침묵을 지키게 하기 위해 집을 사주고, 애인이 처녀이기를 바라는 나르시시스트다. 스티브가 모델인 것일까? 그는 이를 부정한 적이 없다.
1977년 잡스와 당시 여자친구였던 크리스앤과의 사이에서 딸 리사가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크리스앤과 헤어졌고 그 뒤 친자 인정을 거부했다. 크리스앤과 리사는 국가에 의해 잡스가 친자 확인 소송에 기소될 때까지 사회복지기금으로 생활했다. 그가 서명한 한 문서에서 잡스는 자신이 무정자증이고 불임이어서 육체적으로 아이를 만들 수 없는 몸이라고 적었다. 법원은 그에게 혈액 검사를 강제했고, 그가 아버지가 맞다는 결과가 나왔다. 잡스는 오랫동안 생활비 지급을 거부했지만 결국 매달 385달러를 보내게 되었다.
1991년 그는 로렌 파월과 결혼했고, 두 사람은 3명의 자녀를 가졌다. 만족스러운 인생일까? 이런 경력을 쌓은 남자가 스스로 그것을 아직 의심할 수 있을까?
VI. 병사들
애플의 문화는 대립적이고 직접적이며 서로를 대하는 태도는 시끄럽고 거칠다. ‘고함 문화’라고 이 회사의 스타인 한 젊은 프로그래머는 말한다.
애플에는 한쪽에는 프로그래머와 엔지니어, 다른 쪽에는 관리부라는 2개의 큰 라인이 존재한다. 청바지와 티셔츠를 즐겨 입고, 직원 3만4천 명이 있는 제국은 4명에서 25명으로 만들어진 팀들로 구성됐으며, 그 팀은 팀장이 지배한다. 그 위에 CEO와 부회장, 전문경영인 부회장이 있고, 이 작은 평행 우주에는 이사회와 자신들의 요구를 표명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몇몇 고객과 계약 파트너가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 위에 잡스가 군림한다.
오래전에 잡스는 ‘오섬’(awesome)이라는 단어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이 단어는 ‘경탄할 만한’ 또는 ‘굉장한’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 미국 청소년들은 누구나 ‘오섬’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 단어는 값싸고 약간은 혐오스러운 유행어가 되어버렸다. 애플 제품도 이와 같이 될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라고 젊은 프로그래머 마이클 모어(가명)는 말한다. “잘나갈 때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같지만 우리가 두 번 연속 실패작을 내고, 스티브가 세상을 떠나면 금방 그렇게 될 걸요.”
그는 샌프란시스코의 한 카페에 앉아 있었다. 그는 자신이 애플에 관해서 털어놓았다는 사실이 절대로 알려져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침묵 서약을 깨는 사람은 바로 해고됩니다. 블랙리스트에 올려지고 다시는 고용되지 않아요. 그리고 애플의 변호사들을 상대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젊은 프로그래머가 묘사하는 회사는 불공평하고 거칠며, 때로는 목적 없이 떠돌다가 다시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주고, 엄격하지만 동시에 창조적이고 뛰어난 상상력으로 움직이고 있다.
스티브 잡스는 절대로 프로그래머들이나 그들의 상사와 이야기하지 않는다. 애플에서 누구도 엘리베이터에서 잡스를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잡스가 질문을 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어디에서 일하나? 왜 우리에게 그것이 필요한가? 그리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서 그는 “아니, 우리는 그게 필요 없어”라고 말한다.
언제나 몇몇 팀이 스포트라이트 속, 그러니까 잡스의 눈길 아래에서 일을 한다. 이 팀들은 모든 돈과 수단과 세계로 향하는 통로를 지원받는다. 하지만 이 스포트라이트는 캠퍼스를 배회한다. 그 말은 내부적으로 숨가쁘게 정치질이 이루어진다는 소리다. 수많은 대화가 오가고 누구나 다른 사람의 관심을 끌기를 원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잡스의 관심을 원한다. 하지만 잡스가 원하는 것은 결과물이고 그 외에 그가 진심으로 관심있어 하는 것은 없다. 애플에서 최고의 관리자이자 진짜 영웅으로 인정받는 사람은 잡스의 고함을 특히 많이 들으면서 자신의 부하 직원들에게는 침착하게 대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데이비드 소보타는 해고되는 순간까지 상당히 오랫동안 애플에서 일한 사람이다. 그는 불안감이 ‘체계적’이라고 말한다. 소보타의 임무는 쿠퍼티노에서 설계된 제품을 군대와 미국항공우주국(NASA) 그리고 대학에 파는 것이었다. 오늘날 그는 전망이 좋은 버지니아 로아노크의 언덕 꼭대기에 살고 있다. “회사 전체가 그 모양입니다. 누구도 뭔가 결정을 내리려 하지 않아요. 그 결정에 스티브가 화를 낼 수도 있거든요. 애플에는 죽은 고깃덩어리가 참 많습니다.”
‘죽은 고깃덩어리’, 이것은 미국식 냉소다. 그 사람이 회사에 없어도 아무도 인식하지 못할 사람, 즉 있으나 마나 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소보타가 장군들, 교수들과 함께 쿠퍼티노에 오면 약속을 잡을 수도 없고, 잡스와 직접 만나게 된다는 보장도 없었다. 언제나 그렇게 될 수 있다라는 분위기만 풍겼다. “하지만 그곳으로 날아간 장군들은 누구나 잡스와 만나고 싶어 했다”고 소보타는 말했다. 그리고 가끔 잡스가 나타날 때도 있었다.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면도도 하지 않은 상태로 말입니다. 질문에 대답하지도 않고 언제나 그 순간 그가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만 말했어요. 하지만 그는 언제나 공간을 지배했지요.”
애플은 미팅이 많은 회사다. 그곳에서는 언제나 회의가 열리지만 결정되는 것은 없다. 그리고 스티브 잡스는 집으로 돌아가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직관을 믿는 법을 배웠고, 수년 동안 천재라는 소리만 들어왔다. 그 때문에 그는 오늘 아침 샤워를 하고 나서 어제 시행을 결심했던 프로젝트를 중단해버릴 수 있다. “잡스가 무대 위에 올라가 추종자들에게 이야기할 때까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라고 소보타는 말했다.
이것이 ‘애플 군단’의 영광의 순간이다. 바로 이 순간이 그들의 목표인 것이다. 병사들은 돈을 잘 벌기는 하지만 엄청나게 버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연봉과 보너스 그리고 주식을 받는다. 병사들은 진짜 중요한 것은 그의 빛 속에 서 있는 순간이라고 말한다.
스티브 잡스는 이름을 말하는 일이 별로 없다. 그는 “이들이 아이폰을 개발한 팀입니다. 박수를 보내주십시오”라고 말한다. 그들은 일어서서 돌아선다. 잡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박수를 친다. 그것이 그들이 원하는 전부다. 이 5초, 이 시간을 위해 그들은 3개월간 하루에 20시간을 일했다. 만일 직원을 존중하는 분위기에 의사 소통이 잘되고 현대적으로 경영된다면 애플이 더욱 성공적이었을 수 있을까?
1997년 스티브 잡스가 애플로 돌아온 뒤 연매출이 약 70억달러에서 430억달러로 증가했다. 주가는 5달러에서 260달러로 상승했다. 2009년 애플은 89억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3만4천 직원이 1인당 24만달러의 수익을 만들었다는 얘기다.
설립된 지 34년이 지난 지금 애플은 더 이상 컴퓨터 제조회사가 아니다. 애플이 어떤 회사인지 말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 그리고 앞으로 애플이 어떤 회사가 될지 예측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로 보인다. 거대한 전자회사? 디지털 시대를 위한 라이프스타일 제품의 창시자?
음악의 소비와 생산과 판매 형태는 모두 10년 전과 다르다. 아이팟에는 1만 개 곡을 입력할 수 있다. 바지 주머니 크기의 언제라도 들을 수 있는 완전한 음악 컬렉션이다. 그 때문에 많은 대기업이 추락했고 아이튠스, 그러니까 애플이 권력을 승계했다. 이 온라인 음악 상점보다 음악이 많이 팔리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아이팟은 사회적 현상이 되었다. 출시된 지 3년 뒤, <뉴스위크>에서 묘사했듯이 “삶을 변화시키는 문화적 아이콘”이 된 것이다. 당시 애플은 겨우 300만 대의 아이팟을 팔았다. 그리고 지난 3년 동안 애플은 1억6천만 대를 팔았다.
출판사와 미디어 회사들은 아이패드에도 이와 같은 붐을 기대하고 이미 오래전부터 그들의 책과 잡지를 아이패드에 전자 양식으로 제공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 잡스는 물론 이를 ‘마법’과 ‘혁명’이라고 칭한다. 아이패드 역시 대기업, 잡지, 출판사, 신문사 그리고 TV 방송사를 위한 단순한 선물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패드는 새로운 독자와 새로운 시청자,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운 수입원을 약속한다. 그들 모두는 디지털 시대에도 과거의 상품으로 돈을 벌 수 있기를 희망한다. 광고주에게는 이미 충분히 매력적이다. 동영상을 첨가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광고를 더욱 생생하고 양방향 소통적으로 만들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타임>은 자사의 첫 번째 아이패드 버전에 광고를 게재하기 위한 비용으로 20만달러를 받았다.
물론 잡스도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아이패드를 개발한 이유다. 이번에는 여러 분야의 업계를 한꺼번에 변화시키고 그들을 애플과 연결하기 위한 시도인 것이다. 애플은 잡지를 아이패드에서 읽을 수 있게 하기 위해 잡지 형태가 어때야 하는지 결정하는 데 참여할 것이고, 출판사가 제공하는 콘텐츠 가격을 결정할 때도 목소리를 낼 것이다.
애플이 지배하는 새로운 시장보다는 시장이 아예 없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다. 어쨌든 잡스의 경쟁자들은 시장이 포화 상태에 이를 것이기 때문에 아이패드로 애플의 지배가 끝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것 같다. 그보다 더 현실적인 것은 다가오는 애플의 시대는 지나간 시대보다 더 번성할 것이라는 예측이다. 애플은 다른 누구보다 엔터테인먼트 시장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고, 그들이 계속 다른 분야, 현대인의 삶의 새로운 분야로 뻗어나가면서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한동안 계속 위로 올라가다 어느 날 갑자기 애플의 세계가 무너질 수도 있다. 스티브 잡스가 결국 쓰러져서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그의 회사가 그에 전혀 대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인된다면 말이다.
잡스가 처음 쓰러진 것은 2004년이었다. 췌장암이었다. 당시 의사들은 최소한 10년은 더 살게 된다면서 수술을 권유했다. 하지만 잡스는 망설였다. ‘첨단 기술의 교황’은 의학 기술을 신뢰하지 않았다. 채식주의자이자 선불교를 믿는 잡스는 식이요법과 그의 자연요법사가 추천한 구슬을 사용하는 대체의학을 선호했다. 그는 9개월간 수술을 거부했고, 이 기간에 이사회는 주주들에게 잡스의 병과 치료 방법에 대해 알려야 할지 의논했다. 하지만 이사회는 스티브 잡스를 추앙하는 사람들로 구성돼 있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2004년 7월31일 잡스는 수술을 받았다. 다음날 그는 직원들에게 그가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병이 들었지만 이제 다 나았다고 쓴 전자우편을 보냈다.
5년 뒤 그는 다시 쓰러졌다. 그에게는 새로운 간이 필요했고, 물론 매우 빠르게 기증받았다. ‘자동차 사고로 숨진 20대 남성’의 장기를 기증받았다고 잡스는 말했다. 2009년 중반 왕은 다시 자신의 제국으로 돌아와 마치 모든 것이 예전과 똑같은 것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마치 망하기 직전의 로마 같았어요.” 그 시기를 겪은 어느 사람이 말했다. 잡스가 사라지자마자 애플에는 제대로 된 구조도 규칙도 없다는 사실이 확연해졌다. 잡스가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릴 것인가, 아니면 위로 치켜올릴 것인가? 오로지 그것만이 중요했다.
그 뒤 “황제는 병이 들었고 모든 원로는 자신의 사병을 무장시키고 권력을 탐냈다”고 속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말했다. 복수전이 펼쳐졌다. 잡스가 자신의 재등극 당시 데리고 온 사람들은 잡스가 없어진 순간 사냥감이 되었고 모든 중요한 안건에서 소외됐다. “제품이 발표됐다가 다시 취소되고, 다른 곳에서는 성급하게 개발됐다가 다시 버려졌습니다. 모든 것이 사내 정치였죠.”
잡스가 없는 애플은 불안에 떠는 젊은이들의 모임일 뿐이었다.
보스는 보통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을 즐기지 않는다. 특히 약점에 대해서는 더욱더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2005년 6월 뜨거운 여름날 그가 스탠퍼드대 스타디움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마치 고해와도 같은 연설을 할 때, 그는 드디어 그의 세 번째 이야기를 했다. 삶과 죽음의 이야기를.
그는 젊었을 때 이런 격언을 읽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네가 매일매일을 오늘이 너에게 주어진 삶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산다면 어느 날엔가는 그것이 진실이 되는 날이 있을 것이다.” 이후 잡스는 오늘이 그의 삶의 마지막 날이라면 그가 지금 하려는 일을 할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고, 만일 대답이 ‘아니요’라면 계획을 변경했다고 한다.
그는 침을 삼켰다. 그리고 잡스는 지금으로부터 1년 전 오후 7시30분에 의사와 만나고 있었다고 말했다. 진단 결과는 췌장암으로 치유가 불가능했다. 그에게 남은 시간은 3개월에서 6개월이라며 의사는 “주변을 정리하십시오”라고 말했다. “나는 검사로 인해 살았습니다. 그날 밤 저는 생체 검사를 받았습니다.”
의사들은 호스를 삽입하고 암세포를 떼어내 분석했다. 그리고 그들은 눈물을 흘렸다. 수술을 하면 그가 살 수 있다고, 그의 경우는 아주 드문 특별한 예외라고 말했다.
교훈이 있는가? 교훈은 언제나 있다. “여러분의 시간은 한정돼 있습니다. 그 시간을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기 위해 허비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의 결과일 뿐인 도그마에 스스로를 가두지 마십시오. 타인의 목소리로 만들어진 소음에 휩쓸려 여러분 내면의 소리를 죽이지 마십시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심장과 자신의 직관을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심장과 직관은 여러분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항상 굶주려 있어야 합니다. 언제나 도전적으로 사십시오.”
기사원문 : http://www.economyinsight.co.kr/news/articleView.html?idxno=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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