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이야기

[나무를 찾아서] 여자의 사람됨을 지키려던 조선의 선비가 심은 나무

s덴버 2012. 3. 13. 15:35

[나무를 찾아서] 여자의 사람됨을 지키려던 조선의 선비가 심은 나무

[2012. 3. 12]

지난 8일은 '세계 여성의 날'이었습니다. 여자의 사람됨을 지키기 어렵던 시절, 목숨을 걸고 싸웠던 여자 노동자들의 투쟁을 기념하는 날이지요. 남자로서는 모두 헤아리기 어려운 여자의 여자됨, 혹은 사람됨을 지키기 위한 그들의 험난했던 길을 곁의 여자들과 함께 돌아보는 날로 기억해야 하겠지요. 우리의 역사에서도 여자들의 사람됨을 지키기 위한 안간힘의 흔적은 적잖이 찾을 수 있습니다. 나무 중에도 그런 나무가 있습니다.

충북 보은 풍림정사의 은행나무입니다. 하기야 나무가 여자를 위해 무슨 특별한 싸움을 했겠습니까. 호들갑을 떠는 근거는 이 나무를 심고 정성 들여 키운 조선후기의 선비의 인간성 회복에 대한 노력입니다. 그리 많이 회자하는 업적을 남긴 선비는 아닙니다만, 조선 후기에 그가 남긴 독특한 저작물에서 여자의 사람됨에 대한 관심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제가 조선시대의 여러 저작물의 가치나 의미를 짚어볼 깜냥은 안 됩니다만, 당시 한 선비가 여자의 사람됨을 위해 남긴 독특한 저술이 잊혀간다는 것이 아쉽다는 생각만큼은 버릴 수 없네요.

조선후기에 활동한 문학자이자 경학자인 호산 박문호(朴文鎬, 1846∼1918)가 그 사람입니다. 보은 지역에서 태어난 그는 중국의 유학 관련 경전을 비롯해, 퇴계와 율곡에서 시작하여 김장생, 송시열 등 근대 한국 유학자들의 주요 저작들을 깊이 있게 해석한 여러 권의 주석집을 남겼습니다. 그 중에 '칠서상설(七書詳說)'이라는 저술은 당시 유학 경전 주석의 집대성이라 할 의미있는 저술이라고 합니다.

중앙 진출보다는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인 박문호의 여러 저술 가운데에 '여소학(女小學)'이 있습니다. 비교적 잘 알려진 '소학(小學)'에 비해 다소 생소한 책입니다. 박문호가 여자도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 갖추어야 할 갖가지 소양들을 가르치기 위한 쓴 책입니다. 평소 남녀 차별의 극복을 강조했던 그는 남녀를 불문하고, 하늘이 주어진 본성대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억압된 여성의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사는 평화로운 세상이라는 겁니다. 여자에게도 당시 남자에게 하는 것만큼의 교육은 그래서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최초의 본격 근대 여성교육서인 '여소학(女小學)'이 나오게 된 근거입니다.

그가 고향인 보은 눌곡리에서 후학을 양성하겠다고 마음 먹은 건 서른 일곱 살 때였습니다. 과거 시험에 몇 차례 떨어지기도 했지만, 그는 후학 양성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달았기에 중앙 진출의 뜻을 접고 고향 마을에 서당을 지었습니다. 지금의 풍림정사입니다. 1872년의 일입니다. 마을 들녘에서 이어지는 길가의 낮은 언덕에 기대어 앉은 풍림정사는 언제라도 아늑하고 평안합니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어서, 사람의 발길도 잦지 않아 더 그렇습니다.

그 평안한 풍림정사 앞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습니다. 마치 풍림정사 지킴이처럼 서 있는 은행나무는 그리 오래 되지도 큰 나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나무의 크기는 외형적으로만 가늠되지 않습니다. 나이도 규모도 그리 크지 않아도 '큰 나무'라고 불러야 할 나무는 얼마든지 만날 수 있습니다. 언제나 나무는 그 나무를 심은 사람의 뜻을 간직하고 그와 더불어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사람보다 더 긴 세월을 살아가는 때문이지요. 나무 앞에 오래 멈춰 서서 그의 줄기 위에 새겨진 숱한 세월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나무와 사람 이야기 (67) - 보은 풍림정사 은행나무] 칼럼 원문 보기
[참고 : 원문 보기 페이지인 신문사 웹사이트에서는 연재 번호를 76회로 표시했으나, 67회가 맞습니다.]

바로 풍림정사 은행나무가 그런 나무입니다. 마을 사람들이야 귀하게 여기는 나무이지만, 별다른 기록은 없습니다. 나무는 문화재도 보호수도 아닙니다. 풍림정사를 처음 지은 연대와 나무의 나이를 어림짐작하며 추정할 수 있는 몇 가지 근거만 있을 뿐이지요. 풍림정사를 지은 건 140년 전이고, 나무의 나이는 대략 150살 전후로 여겨집니다. 나무가 생명을 얻어 이 자리에 뿌리를 내린 건 필경 풍림정사를 지은 선비 박문호와 연관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은행나무에 새겨진 세월의 깊이를 가늠하면 나무는 풍림정사를 처음 세웠던 당시에 심은 나무임에 틀림없습니다. 필생의 사업으로 정성 들여 이 서당 '풍림정사'를 지은 선비 박문호가 손수 심었을 가능성은 더 높습니다. 대개의 유학자들이 좋아했으며 특히 유학 관련 기관에서 가르침의 상징으로 여긴 은행나무였다는 점에서 이 나무를 골라 심은 사람이 바로 유학자 박문호였음은 아마도 정확한 추측일 겁니다.

풍림정사 은행나무는 10년 쯤 전에 이 근처를 여행하던 중에 우연히 만났습니다.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너른 들판 한켠에 낮은 기와 고택 풍림정사였고, 그 대문 앞에 우뚝 서 있는 은행나무가 건너편 지방도로를 지나던 중에 눈에 들어왔던 겁니다. 고택의 정체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그저 풍경이 좋아 발길을 돌리게 됐습니다. 조붓한 논길을 따라 풍림정사에 다다랐고, 한나절 넘게 대문 앞의 은행나무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풍림정사를 처음 세운 이가 조선 후기의 선비 박문호였다는 정도는 대문 앞의 문화재 안내판을 읽고 알았지요. 그가 독특하게도 고향에 은거하며 후학을 양성하고, 여자의 사람됨을 지키기 위해 '여소학'이라는 난데없는 책을 써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들입니다. 남존여비 사상이 만연하던 그 시절에, 남자와 여자의 차별을 극복해서 인간다운 세상을 이루자고 주장했던 선비가 있었다는 사실은 놀랍고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풍림정사 은행나무가 제게 더 소중해진 이유입니다.

염치없게도 '세계 여성의 날'을 아무 생각 없이 흘려 보내면서, 우리의 선비 박문호와 그가 심어 키운 은행나무가 떠오른 건 그래서였습니다.

바람 차가운 봄입니다. 활기를 찾은 캠퍼스 뿐 아니라, 모두가 새 봄 맞이에 분주한 때입니다. 더 건강한 한 주 보내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