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기증

콩팥 없는 남자, 배씨의 인간극장

s덴버 2011. 4. 20. 10:08

 

 

 

교통사고가 안 났다면, 나는 중국에서 죽었을 거요

"그 날 우리가 탄 자동차를 앞에서 들이받지 않았으면, 나는 지금 죽은 사람이요." 우리는 대개 잊고 산다. 장애란 특정한 사람들만이 가지고 태어나는 게 아니라 어느날 갑자기 누구에게라도 닥칠 수 있다는, 차마 내뱉기 두려운 사실을. 9년 전 배안석씨(52, 시흥4동)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 배씨는 나름대로 잘 나가던 기계 기술자였다. 2003년 말 직원들을 인솔하고 중국에 출장을 가던 길에 갑자기 반대편에서 달려온 차가 일행을 들이받았다. 다행히 크게 다친 사람은 없었는데 병원 사람들 표정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아저씨는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에요, 빨리 큰 병원 가세요,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의 병원으로 옮겼죠. 의사 말이 하나도 없대요, 내 콩팥이, 다 죽었대."

그날부터 배씨는 일주일에 세 번씩, 그의 표현대로 '죽지 않기 위해' 신장 투석을 해야 했다. 중증장애인 2급인 신장질환은 몹쓸 병이었다. “전철을 타면 나이 드신 분들한테는 자리를 양보하지만 나한테는 안해요. 속은 곯았지만 겉은 멀쩡하거든. 그러다가도 픽 쓰러지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는 게 신장 투석 환자예요.” 월수금, ‘피 투석’하는 날은 오전 8시부터 움직인다. 12시쯤 투석이 끝나면 오후 1~2시간은 기력이 없어 병원 휴게실에 꼼짝 않고 있다가 멍한 정신으로 귀가길에 오른다. 밥벌이는 차마 생각도 못했다. “화목 이틀만 일한다고 하면 나 같은 사람한테 누가 일 시켜 주겠어요. 집사람도 마찬가지죠. 항상 환자 옆에 붙어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9년이 순식간에 흘러갔고 가진 재산도 야금야금 먹어치웠다. 보증금 3000만원, 월세 30만원 집으로 옮겨갔는데, 그마저도 다 까먹어서 집주인이 나가달라고 했다. “친척집에 집사람이랑 애들은 나눠 보내면 어떻게 살겠지 싶었는데, 나는 글쎄...남들 얘기인 줄만 알았던 노숙자가 지름길이더라구요.” 그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축하드려요. 중증장애인 전세주택 입주자로 선정되셨어요. 금천구에서 두 명 올렸는데 선생님이 뽑히셨어요." 뿔뿔이 흩어지기 직전이던 배씨 가족은 이렇게 해서 다시 같이 살 수 있게 됐다.

뿔뿔이 흩어질 뻔한 우리 가족, 전화 한 통이 살려줬다

배씨처럼 신체적인 조건 때문에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일자리를 갖기가 어려운 중증장애인들에게 가장 큰 고충은 역시 주거문제다. 저소득 중증장애인 전세주택은 세대주가 장애등급 1, 2급이고 신청 당시 월세주택에 거주하고 있다면 일단 지원대상. 2인이하 가구는 세대당 6천만원 이하, 3인이상은 7천만원 이하까지 전세금을 현금으로 지원하며, 2년이 원칙이지만 2회 연장하여 최장 6년까지 지원 받을 수 있다. 신청장소는 거주지 동주민센터다. 배씨의 경우도 독산2동주민센터 복지과 직원이 당시 자신도 모르게 신청해줘서 수혜자가 됐다. 그 직원은 차후에 구청으로 옮겨갔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인맥도 ‘빽’도 없는 자신에게 복지혜택을 연결해준 것을 지금도 고맙게 생각한다고.

물론 전세주택은 기한이 있다는 게 아쉬운 점이다. 6년간 어떻게 해서든 자립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누가 봐도 장애인 영구임대주택에 입주하는 편이 백배 낫다. 배씨도 전세주택 지원금을 받은 지 3년이 지났으니 앞으로 3년 후의 대책을 세워야 한다. “사실 얼마 전에 광명시에 있는 새 장애인임대아파트가 나한테 왔어요. 17평인데 내가 무조건 1순위래. 그런데 보증금이 1천700만원 있어야 하더라구. 그보다 오래 된 하안동 아파트는 400만원만 있으면 된다는데. 근데 생각해봐요, 월세 30만원도 못 내는 사람이 1000만원이 어디 있고 4백만원이 어디 있습니까?”

배씨 가족의 수입은 장애수당 16만원과 수급수당 등을 포함해 총 54만원의 정부지원금이 전부다. 전기세, 수도세, 가스세 그리고 비상연락수단이라 없앨 수 없는 휴대폰의 기본비용을 내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다. 외식이란 말은 잊은 지 오래다. 옷 살 생각은 더더구나 못 한다. 밥 세 끼 먹으면 그저 다행이다. 그나마 딸은 일찍 시집을 갔고, 지금 고3인 아들도 졸업하면 바로 군대에 갈 거라고 했다. “어떡하겠어요. 그렇게라도 사는 수밖에 없어요. 이 힘든 투병생활을 헤쳐나가려면 숟가락 하나라도 더는 게 방법이지.” 그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가 들려준 말은 넋두리가 아니라 현명한 지혜 같았다. “내가 그래도 아들 앞으로 매달 54,000원 보험을 들고 있어요. 내가 죽으면 수급자에서 제외되니까 의료 실비를 내야 되거든요. 그래서 아들만큼은 뭔 짓거리를 해서라도 안 먹고 안 쓰고 보험을 들어주려는 거지.”

작년에 딸을 시집 보냈던 ‘무용담’을 들려줄 때는 핏기없이 거무죽죽했던 얼굴이 일순간 환해지기까지 했다. “웃긴 얘기 해줄게요. 일단 200만원을 빌렸어요. 그걸로 여태까지 살아가면서 알았던 사람들한테 청첩장을 다 돌린 거야. 무조건 오게끔 만드는 거죠(웃음). 그랬더니 100명 조금 넘게 왔는데, 내가 아프니까 보태주는 셈치고인지 축의금을 10만원부터 30만원까지 내더라구. 그렇게 해서 1000만원 조금 넘게 들어왔어요. 빌린 돈 갚고, 결혼식 치르고, 우리 딸이랑 살림살이 사러 다녔죠. 그렇게 살아갑니다.”

배씨라고 왜 극단적인 생각을 안 했을까. 얼씬도 안 하던 교회에 나가 미친 듯이 기도도 해봤고, 죽으려고 산에도 숱하게 올라갔다. 그런데 퍼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내가 죽으면 장애인 수급이 끊기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애들 어떻게 될까 싶으니까 차마 죽지 못하겠더라구요. 나라도 살아줘야 수급이 나오지...” 그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가정이 90% 이상 깨지는 것을 목격했다. 어려울 때일수록 무엇보다도 가장이 정신적으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어야 한다고 했다. 돈이 많다고 좋은 것도 아니고, 반대로 돈이 없다고 불행해야 하는 것도 아니라면서. 갑자기 막막해졌다. 어느날 갑자기 인생의 행로에 ‘쓰나미’가 밀고 들어온다면 우리는 버텨낼 수 있을 것인가? 배안석씨처럼?

3년 후 미래는 알 수 없지만,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다

배안석씨를 따라 대림동 강남성심병원을 나왔다. 얼마 전 아기를 낳은 딸네 집에 아내가 산후조리를 도와주러 가는 바람에 오늘은 혼자 병원에 왔다기에 집까지 말동무가 되기로 했다.

벌써 종점이다. 그는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보여준다. 투석 일시와 담당자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 있는 수첩이다. 그 안쪽에 아름답고 건장한 청년의 사진이 한 장 끼워져 있다. 세상을 향한 자신감 있는 미소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같은 사람인지 모르겠죠?”하면서 늙은 배안석이 젊은 배안석을 그윽하게 바라본다. “지금 집이 캄캄한 반지하죠. 공기가 안 좋아요. 이전 집은 2층이어서 좋았는데, 주인이 2년 연장을 안 해줘서, 계약서 다시 쓰기 싫다고, 여기 오게 됐죠. 맘에 드는 집이 중간에 있었는데 약속한 날 주인이 또 펑크를 내는 거야. 중증장애인 전세주택은 일시불로 나중에 5천만원 지원금이 나오니까 계약금을 걸 수 없어서 주인들이 변심하는 거죠. 1년 후에 또 집 구할 걸 생각하면 좀 불안해.”

배씨 집 근처 동네의 아파트 담장에 핀 벚꽃들이 눈이 부시다. 그는 작별인사를 대신해 이렇게 말한다. "앞으로 후딱 3년이 지나겠지만, 다른 사람도 혜택을 받아야 하니까 더 이상 달라고 말은 못하죠. 나뿐 아니라 힘든 사람 많잖아요. 나도 이렇게 복지과에서 고맙게 해줬으니까 그저 감사하고, 그 다음에 어떻게 헤쳐나갈지는 몰라도 그건 내 운명이니까 운명을 어떻게 피하겠어. 사람이 죽고 싶어도 못 죽고, 살고 싶어도 못 살고 그런 거예요. 여기까지가 내 운명인 거야."

 

 

 

원본출처 : http://inews.seoul.go.kr/hsn/program/article/articleDetail.jsp?menuID=001001006&boardID=175923&category1=NC1&category2=NC1_6¤tPag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