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기증

기증할 수 있는 신체부위 다 내줄터… 간·신장도 이미 떼줬죠

s덴버 2011. 6. 7. 16:23

<사랑 그리고 희망  -  2011 대한민국 리포트>

“기증할 수 있는 신체부위 다 내줄터… 간·신장도 이미 떼줬죠“

 

아마도 ‘성자(聖者)’란 그와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일 듯싶었다. 그는 ‘살아서 기증할 수 있는 인체 부위는 모두 기증하고 싶다’는 소망을 실천에 옮겼다. 지난 27년간 보름에 한 번꼴로 불특정다수를 위해 헌혈했고, 한쪽 신장과 간의 절반도 떼어 생명이 위태로운 난치병 환자에게 기증했다. 그는 매번 상당한 후유증에 시달릴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수술대와 헌혈대 위에 누웠다.

 

국내 최다 헌혈기록을 보유한 ‘헌혈왕’손홍식(61)씨를 지난 19일 오후 광주 북구 용봉동 ‘전남대 헌혈의 집’에서 만났다. 초록색 반팔셔츠 위에 대한적십자사 봉사자용 노란색 조끼를 걸쳐 입은 옷차림이었다. 그는 지난 13일에는 이 곳에서 602번째 헌혈을 했다.

 

 

얼마 만에 헌혈했느냐고 묻자 “최근 몇년간은 2주에 한 차례씩 꼬박꼬박 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지난해 6월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 새생명나눔회 등이 주최한 백두산 여행(4박5일)을 가기 전까지는 격주로 화요일에 헌혈을 했어요. 여행을 다녀온 뒤에는 주기가 달라져 2주마다 금요일에 해오고 있습니다. 603번째 헌혈은 오는 27일 할 예정입니다.”

 

손씨는 생애 처음 헌혈한 날짜를 기억하고 있었다. 1984년 5월29일. “그 무렵 지인에게 적지 않은 돈을 빌려주고 떼인 뒤라 마음이 심란할 때였죠. 점심식사를 한 뒤 산책하면서 직장(통계청 광주사무소) 근처에 있는 헌혈차량이 눈에 들어오자 ‘그거다’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돈 문제 등 세상 일은 모두 상대가 있기 때문에 내 생각대로 안되지만, 헌혈은 내 의지만 있으면 실천할 수 있지 않으냐는 생각이 들어 헌혈차량에 올라탔지요.”

 

그때 손씨는 2개월에 한 차례 정기적으로 헌혈하겠다고 다짐하며 “내 사전에 ‘작심3일’이라는 단어는 없다”는 말을 되뇌었다. 그러나 그의 결심은 오래가지 못해 10회의 헌혈을 채우기까지 4년여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10번을 채우고 나니 헌혈은 내 생활 속의 한 과정이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작심3일은 없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이후 2개월에 한 차례씩은 백혈구, 적혈구, 혈소판, 혈장 등 모든 성분을 뽑아내는 ‘전혈(全血)헌혈’을 했고, 1994년 혈소판, 혈장만 뽑아내는 ‘성분 헌혈’이 가능해지면서부터는 2주에 한 번꼴로 했습니다. 혈소판 헌혈은 백혈병 환자 등을 위해, 혈장 헌혈은 알부민 등 400여가지 약품을 만드는 데 쓰입니다. ”

 

‘피 나눔’을 통해 자신을 내어주는 일을 규칙적으로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장기기증에도 관심이 갔다고 한다. 1990년대 들어 새생명나눔회에 가입해 시작한 자원봉사 활동이 실제 장기기증으로 이어졌다.

 

“자원봉사차 전남대병원 혈액투석실에 가보니 만성 신부전증 환자들이 너무 불쌍했어요. 얼굴에는 핏기가 없고 팔뚝에는 굵은 주사바늘 자국과 째고 꿰매고 한 흔적들이…. 하루 4시간의 혈액투석을 1주일에 3번씩 받아야 하는 그들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사람은 본능적으로 갈증나면 물 마시고 배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는데 그들은 생리적 욕구를 참고 살아야 하잖아요.”

1994년 7월28일 그는 전남대병원 수술대에 누웠다. 신장기증 의사를 밝힌 지 4년만이었다. 그의 신장 조직과 맞는 환자를 찾아내고 검사하는 데 4년이 걸렸고, 가족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헌혈은 몸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으니까 아내(59)가 자연스럽게 이해를 했는데, 신장을 기증할 때는 반대가 심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신장기증이 생소했으니까요. 아이들(1녀2남)은 당시 어렸고…. 아내는 ‘아무리 의술이 발달했다고 해도 실패하면 남은 가족은 어떻게 되겠느냐. 매우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우여곡절 끝에 수술을 하고 아내와 함께 혈액투석실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서야 아내가 이해를 해주더군요.”

 

손씨는 2002년 11월28일 자신의 간 절반도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내놓았다. “그해 10월 중순 날씨가 시원해지자 간기증은 이렇게 좋은 계절에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장을 기증할 때는 더운 여름철이어서 고생했거든요. 그래서 서울 아산병원 코디네이터에게 전화를 했는데, 절차가 매우 빨리 진행됐습니다. 이번에는 의외로 아내의 반대가 심하지 않았습니다. 반대해봤자 고집을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웃음)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충북에 사는 한 50대 여성은 사위의 간 절반과 손씨의 간 절반을 함께 이식받아 지금도 건강하게 지내고 있다고 한다. 물론 17년 전 손씨의 신장을 이식받은 전남 지역 한 남성의 건강도 좋은 편이라고 한다.

 

손씨는 1990년대 중반 골수기증도 신청했다. 하지만 자신의 골수와 맞는 사람이 없어 실제 기증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선행이 알려지면서 그는 나름대로 마음고생도 했다. 1975년부터 2005년까지 30년 간 봉직했던 호남통계청 조직 내부에서 “통계청에 남아있든지, 대한적십자사로 가든지 하라. 왜 양다리를 걸치느냐”는 핀잔이 자자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공직사회 봉사활동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그는 통계청의 ‘자랑스러운 얼굴’이 됐다.

 

그는 평소 음주를 자제하지만 주량은 ‘두주불사’형이다. 그는 “술통을 지고 갈 수는 없어도 담고 갈 수는 있다”고 말할 정도다. 그가 밥 먹듯 헌혈을 하고 장기를 떼어준 뒤에도 여전히 건강한 것도 이런 체력을 타고 났기 때문이다. 손씨는 요즘도 고향인 전남 보성군 노동면에 있는 1600여㎡ 규모 논농사를 짓기 위해 주말이면 농기구를 챙겨들고 나설 만큼 부지런하다. 그는 틈나는 대로 공부해 공인중개사, 노인심리상담사, 요양보호사, 카운슬링상담사 등 자격증을 따놓았다. 2007년엔 ‘현대문예’지를 통해 수필가로 등단하기도 했다.

 

다시 헌혈로 화제를 돌리자 손씨는 자신의 잠재의식 속에 헌혈의 중요성이 각인된 계기를 털어놨다.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때 광주시민들은 생(生)과 사(死)의 갈림길에서도 자발적으로 헌혈을 했어요. 적십자병원에서 헌혈을 하고 나오다가 곤봉을 맞고 실신한 사람도 있고 심지어 죽은 사람도 있었다고 하죠.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왜 헌혈을 하려고 애썼을까. 이를 보고 제 머릿속에 ‘혈액 = 생명’이라는 등식이 각인된 것 같아요.”

 

그는 헌혈을 해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아직까지 혈액을 대체할 물질이 없습니다. 밥이 없으면 빵이나 라면을 먹을 수 있지만 혈액은 공장에서 만들 수도, 논밭에서 재배할 수도 없습니다. 의학적으로 혈액을 만들 수는 있다고 하지만 실효성이 문제죠.”

 

그의 목표는 만 70세가 되기 전날까지 2주에 한번씩 헌혈하는 것이다. 혈소판 헌혈은 규정상 만 60세로 끝났지만 전혈 헌혈, 혈장 헌혈은 앞으로 8년정도 더 할 수 있다고 한다. “보통사람의 경우 혈액 양의 10%는 비상식량처럼 여유분입니다. 헌혈을 자주 해도 생활에 지장이 없습니다. 혈액의 일부가 매일 소멸되고 다시 생기기 때문이죠. 헌혈은 목욕이나 이발처럼 혈(血)과 기(氣)를 순환시켜주는 장점도 있습니다. 헌혈은 방안의 탁한 공기를 바꿔주는 환기와도 같은 것입니다.”

 

‘헌혈 예찬론’을 펼치던 그는 평소 소신이라며 강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많은 사람이 헌혈을 희생이다 봉사다 하는데 그런 고정관념을 바꿔야 합니다. 저는 헌혈을 ‘건강한 사람의 특별한 권리’라고 정의합니다. 다만 가만히 앉아서 얻어지는 권리는 아니고, 적극적으로 실천해서 얻는 권리죠.”

 

종교가 있느냐는 물었다. 그는 “모든 종교가 상대방을 사랑하고 포용하는 점은 같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단지 ‘일일신 일일선(日日新 日日善)’이라는 좌우명을 신조로 삼고 살아가고 있다”고 답했다. 하루라도 선행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아름다운 중독’이 그 속에 가득 배어 있는 것이다.

 

문화일보 광주 = 정우천기자 goodpen@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