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정끝별]봄날 흰머리 몇 가닥을 세다
영화 ‘디센던트(The Descendants)’를 봤다. 죽는 자들이 후대에 남겨줘야 할 유산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게 하는 영화였다. 가족, 사랑, 자연,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영화는 보트 사고로 의식불명이 된 아내를 지켜보는 남편의 독백으로부터 시작한다. 자기만
모르고 있었던 아내의 바람 소식을 그것도 딸에게서 듣고는 반바지에 슬리퍼를 끌며 바람에 저항하듯 위태롭게 달리는 옆집 아저씨
조지 클루니를 보는 재미가 삼삼했고, 질풍노도를 골인하려는 첫째 딸과 이제 막 스타트하려는 둘째 딸의 만행은 남의 집 일만 같지
않아 동병상련했다. 무엇보다 하와이의 풍광은 안구정화 그 자체였다.
그러나 정작 영화 속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다른 데 있었다. 아내의 회생불능 통고를 받은 남편이 꺼낸 아내의 자필 사인 서류였다. 건강할 적 아내는 예기치 못한 사고에 대비해 의식불명 상태에서의 생명 연장치료를 거부한다는 서류를 작성해 놓았던 것이다.
영화관을 나오는 내 머릿속은 불의의 사고에 대비한 '식물인간 치료포기서'와 '사후장기 기증서약서'를 준비하는 문제로 가득 차 있었다. 어느덧 내 머리 밖에도 흰머리 몇 가닥이 돋기 시작했고 죽음은 늘 삶과 이웃해 있으니.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
사실 죽음은 살아있는 동안 미리미리 예비하고 준비해야 할 정기적금이나 보험과도 같은 것이다. 오래전 '죽음의 완성' 이라는 시를
쓴 적 있다. 200년쯤 후에는 인간의 수명이 200세까지 연장된다는 기사를 읽고 나서 쓴 시였다. 200세라니! 내겐 축복이라기보다는
저주처럼 다가왔다. 끝이 없다는 것처럼 큰 저주가 있을까. 드라큘라나 좀비의 가장 큰 비극은 죽지 못하는 것일 게다.
"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 " 이라고 했던 이는 암 선고를 받은 후에도 애플의 신화를 일궈냈던 스티브 잡스였다.
시련이나 고통 한가운데서,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서, 끝 혹은 죽음의 순간을 떠올려보는 것은 큰 힘이 되곤 한다. 죽기 전에 뭐가
보일까? 뭐가 가장 후회스러울까?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얼굴이 누구일까?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은? 이런 물음은 지금, 여기의 삶을
더욱 두텁고 깊게 해준다.
오래전에 봤던 '버킷 리스트(The bucket list)'라는 영화에는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이라는 부제가 달렸었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노년의 두 남자가 얼마 남지 않은 삶에서 '꼭 해보고 싶은 일'에 대한 리스트를 만들고는 이를 하나씩 '해보는' 이야기였다. " 인생에서 가장 많이 후회하는 것은 살면서 한 일들이 아니라 하지 않은 일들 "이라는 영화의 메시지처럼 '버킷 리스트'란
덜 후회하는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지금, 여기, 우리가 해야 할 것들에 대한 성찰 리스트라 할 만하다. '버킷'이 스스로 올라선 후
(목을 매달고) 자신의 두 발로 차야 할 삶이라는 양동이이든 죽기 전의 간절한 목록들을 담아내는 욕망이라는 양동이이든, 죽음
또한 받아내야 할 빈 공간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덜 후회하기 위한, 삶이라는 양동이 관리가 바로 버킷 리스트인 셈이다.
늙음을 받아들이고 죽음을 준비하는 삶은 보무도 당당할 것이다. 스스로를 낮추며 타인에게 너그러울 것이고,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러니 사랑하고 행복할 일들을 미루지 않을 게 분명하다. 하루를 마치고 나란히 누워 서로의 무사함을 확인하며 잠에 들듯, 우리의 한 생도 그렇게 따뜻하게 긴 잠에 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루가 무사해서 다행이고, 하루를 잘 견뎌내서 대견스럽고, 편안한 잠에 들 수 있어서 고마울 것이다.
아침이 싱그러운 것은 밤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우리 삶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 또한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꽃이, 청춘이, 사랑이 아름다운 것 또한 그것들의 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문득 우리 삶이 팍팍할 때 늙는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 그리고 버킷 리스트를 떠올려 보자. 그게 너무 거창하다면 내가 잊을 수 없는 것들이나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라도 떠올려 보자. 리스트를 떠올리고 문장화하는 동안 지금-여기-우리의 삶이 다르게 보일 것이다. 수술과 오랜 요양 후 커피전문점 창가에 앉아 현기증을 달래며 마신 첫
커피 한 모금의 향기를 나는 잊지 못한다. 세탁할 적 식구들의 옷에서 나던 살 냄새와 갓 태어난 딸애의 말간 손톱들을, 내 머리맡에서 뛰고 있는 선친의 손목시계 초침소리를 잊지 못하고, 팔순의 엄마가 담가준 파김치 속 희끗한 머리카락 한 올을 잊지 못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죽음을 준비하자
바야흐로 만화방창할 이 봄 또한 머지않아 떨어지는 낙엽들의 추억 속에서 기억될 것이다. 청춘을 남겨주지 말고 청춘의 미덕과
사심 없는 증오와 눈물을 남겨 달라고 기도했던 하인리히 하이네도,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인간은 누구나 시간의 법칙에 순종해야
한다고 했다. 어느 책에서였던가. 청춘이 우리의 주인공을 떠날 때 불렀던 노래의 한 소절이 떠오른다. ‘그리고 태양은, 아직은
아름답게 빛나는구나/하지만 결국에는 질 수밖에 없겠지!’ 이 봄날이 완전 소중한 까닭이다.
정끝별 시인·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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