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이야기

[나무를 찾아서] 옛 선비의 연정이 담긴 나무 한 그루의 슬픈 노래

s덴버 2013. 4. 22. 11:47

[나무를 찾아서] 옛 선비의 연정이 담긴 나무 한 그루의 슬픈 노래  

 

 

[2013. 4. 22]

안동을 다녀오던 날도 궂은 날씨에 함박눈까지 맞았는데, 엊그제 주말의 날씨도 그 날 못잖게 궂었습니다. 낮에 잠깐 내린다는 비

예보와 달리 하루 종일 부슬부슬 비가 내렸지요. 바람도 쌀쌀했고요. 또 어느 지방에서는 진눈깨비가 날리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매화 꽃 지고, 개나리 진달래 화창한 봄날에 눈이라니요. 희거나 노란 빛깔을 띠고 살포시 고개 내민 여리디 여린 꽃잎들이 짓궂은

날씨에 상하지 말아야 할텐데 걱정입니다.

 

겨우 봄 바람 찾아 꽃 피운 냉이, 꽃다지의 예쁜 꽃들이 그 작은 몸으로 이 궂은 날씨를 잘 이겨내기 바랄 뿐입니다. 안동 도산서원을

찾았던 그 날도, 낮은 땅에서 오똑하니 고개를 치켜들고 피어난 꽃다지 꽃이 도드라지게 들어왔습니다. 서원 대문 바로 안쪽에 서

있는 늙수그레한 매화 꽃 그늘 아래의 층층 화단 바닥에 피어있는 꽃다지 꽃은 노랗게 계절을 노래하는 중이었지요. 듬성듬성

제비꽃도 피었지만, 아무래도 이 계절에는 꽃다지 꽃의 샛노랑 화려함에는 당하지 못할 듯합니다.
 

 

   불쑥 안동 쪽으로 길머리를 잡은 건, 남녘의 매화 꽃 졌다는 소식을 들은 때문이었습니다. 언제나 남녘의 매화 꽃 잔치가 막을

내렸다는 소식보다 한 이레에서 열흘 쯤 늦게 피어나는 도산서원의 매화의 안부가 궁금했던 까닭입니다. 좁다란 땅이라고는 하지만,

우리 땅에서도 계절의 흐름에는 적잖은 차이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매실나무 농원에서 매실나무 꽃이 만발했다는 소식 뒤에

탐매행의 명소인 선암사에서 전해온 꽃 소식은 아직 일렀습니다.

 

광양 매실농원 매화 꽃 잔치는 이미 끝났건만 선암사 보살님은 분명히 '이제 한두 송이 피어나기 시작했다'고 전화로 알려주셨어요.

먹을거리를 위해 심어 키우는 매실나무와 우리 고승대덕의 정원을 홀로 아득히 밝히던 살아온 늙은 매화나무의 생장 속도가 같을

수야 없겠지요. 식물도감에는 분명 '매실나무'로 표기돼 있긴 해도, 선비의 정원이나 천년고찰의 돌담에 서 있는 같은 나무만큼은

굳이 매화나무라고 부르고 싶어지는 이유입니다.
 

 

   잔뜩 설레는 마음으로 도산서원의 매화나무를 찾아 이른 아침에 길 위에 올랐습니다. 대개의 고매(古梅)에는 그 격에 맞는 이름이

따로 있는 것처럼 도산서원의 매화나무는 '도산매'라는 이름을 가졌습니다. 아무래도 남녘에서부터 밀려온 봄 소식이 조금은 늦은

곳이어서, 대개는 선암사의 선암매보다 이레나 열흘 정도 뒤늦게 꽃을 피우는 나무입니다.

 

그러나 길을 떠났던 그 날, 유난히 바람이 세게 불었던 때문일까요? 매화는 아직 만개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만개는커녕 채 절반도 피어나지 않았습니다. 고작해야 가지 끝에 몇 송이만 다문다문 피어 있었지요. 하지만 워낙 우리 매화는 풍요로운 것보다는 수척한 것을, 번거로운 것보다는 희귀한 것을, 젊은 것보다는 늙은 것을 높이 꼽는다 했으니,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기뻤습니다. 매실농원에서 만개한 상태의 매실나무 꽃을 감상하는 것이라면, 옛 정원에서는 옛 선비들의 감상법을 따라서, 수척하고 희귀한 것을 고요히 바라보는 게 맞을테니까요.
 

 

   도산서원의 매화에는 이 서원의 창립자인 퇴계 이황 선생의 애틋함이 담겨 있어서 더 각별한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는 나무입니다.

이황 선생이 마흔 여덟에 충북 단양의 군수로 부임했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단양군 관아에는 시문(詩文)에 능하고, 덕이 높은

관기 두향(杜香)이 있었습니다. 당시 두향의 나이는 열여덟이었다고 합니다. 젊은 두향은 새로 부임한 군수 이황 선생에게 얼마

지나지 않아 연정을 품게 됐습니다.

 

이황 선생은 첫째 부인을 스물일곱 살에 잃었고, 서른에 둘째 부인을 맞이했지만, 그이는 선생이 단양군에 부임하기 바로 전에 돌아

가셨습니다. 그때 이황 선생 앞에 나타난 두향은 특별한 존재일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선생은 두향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

습니다. 그러자 두향은 선생의 환심을 얻기 위해 여러가지 선물을 보냈습니다. 물론 선생은 모두 마다했습니다. 그러자 두향은

선생의 주변을 통해 선생이 결코 거절할 수 없는 선물이 곧 매화라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마침내 두향은 인근에서 가장 잘 생기고 건강한 매화 한 그루를 찾아 선생께 선물로 바쳤습니다. 예상대로 선생은 두향의 매화를

거절하지 못하고 잘 받아서, 고이 키웠다는 이야기입니다. 두향과 이황 선생에 얽힌 그 뒤의 이야기는 그리 세밀하게 전하는 게

없습니다. 기록은 없지만, 이야기로 전하는 바에 따르면, 단양 부임 기간을 마친 뒤 두향과 선생은 단 한번도 다시 만난 적이 없다고

합니다. 두향도 선생에 대한 일편단심을 간직한 채 관기 생활을 청산하고, 남한강가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선생이 예순여덟의 나이로 이 세상을 하직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두향은 버선발로 나흘 낮밤을 걷고 또 걸어서

안동까지 달려가 선생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함께 했다고 합니다. 장례를 마친 두향은 다시 자신의 움막으로 돌아왔지만 오로지

선생만을 바라며 살았던 그로서는 삶의 모든 희망을 잃은 셈이 됐지요. 두향은 끝내 남한강에 몸을 던저 일생을 마감했다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이황 선생은 선생대로 두향에 대한 생각이 각별했던 모양입니다. 무엇보다 두향에게서 선물로 받은 매화를 끔찍이 아껴 부임지를 옮길 때마다 매화를 가지고 다녔으며, 종국에는 도산서원 앞마당에 나무를 심고 보살폈다고 전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 자신의 거처를 옮기자 창문으로 매화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나무를 옮겨심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가 죽음에 이르던 날 아침에도 '나무에 물 주거라' 라고 이야기했을 정도로 매화에 대한 애정은 지극했던 게 사실입니다. 선생의 매화 사랑에는 어쩌면 젊은 관기 '두향'에게 미처 표현하지 못한 안타까움이 들어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도 됩니다.

아쉽게도 선생이 아꼈던 그 매화는 이미 오래 전에 죽어 쓰러졌습니다만, 이후 선생이 무엇보다 매화를 아꼈음을 잘 아는 후학들이

도산서원 경내 곳곳에 매화를 여러 그루 심어서 그분의 취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도산매를 찾아 떠났던 그날 도산서원에는 매우 강한 바람이 불었습니다. 개화를 기다리며 찾아온 몇몇 상춘객들이 육중한 카메라

를 들고 경내를 오가고 있었지만, 바람은 몹시 찼습니다. 두툼한 겨울 털장갑을 끼고서도 가끔씩 손이 시려워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잠시 쉬고는 했으니까요. 바람 결에 걸려 하늘에서 내려오던 햇살이 허공을 맴돌며 우리 곁으로 다가오지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제아무리 강한 바람이라 해도 계절의 흐름까지 막을 수는 없습니다. 매화 꽃 찬란한 경내의 돌계단을 천천히 걸어 올라가

도산서원의 중심이랄 수 있는 전교당에 오르자 뒤란으로 통하는 열린 쪽문을 통해 온 가지에 탐스럽고 환한 꽃을 매단 목련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매화 꽃보다 먼저 피어난 목련입니다. 작은 쪽문을 통해 바라다 보이는 목련 꽃은 고요한 서원 경내로

봄의 전주곡을 찬란하게 울리고 있었습니다.
 

 

뒤란으로 돌아 들어 찬란한 이 봄의 노래에 눈을 맞추고 싶었지만, 전교당 마루에 앉아, 옛 선비들이 즐겼을 서원의 정취를 느끼는게

우선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게다가 굳이 시간을 재우칠 필요도 없으니까요. 전교당 마루에 앉아 목련 꽃을 바라보고, 또

앞마당 쪽으로 흐드러지게 피어난 매화 꽃을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마치 오래 전 이 자리에서 학문을 닦던 옛 선비들처럼요.

바람을 못 이기고 흩어지는 매화 꽃잎도 바라보고, 앞산에 듬성듬성 피어난 분홍 빛 진달래 꽃도 바라보는 평화로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경내를 돌아들던 상춘객들이 거의 모두 자리를 떠났을 즈음, 가만가만, 그리고 아주 설레는 마음으로 전교당 뒤란으로 돌아

들었습니다. 아! 한 그루의 백목련이 세찬 바람에 쉼 없이 흔들리며 불러오는 봄의 향기는 더 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습니다. 매화 꽃

찾아 달려온 도산서원에서 이처럼 아름다운 목련의 노래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게 더 없이 기뻤습니다. 그렇게 이 땅에 봄이 찬찬히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날 안동을 찾았던 건, 도산서원 매화를 보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도산서원 못미처에 자리잡고 서 있는 한 그루의 늙은 무궁화도

찾아볼 요량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오래 된 무궁화 가운데 한 그루이지요. 물론 씁쓸한 뒷맛을 남기긴 했지만,

그 무궁화도 찾아보았지요. 그 무궁화 이야기는 다음 편지로 미뤄야 하겠습니다. 늙은 무궁화 뿐 아니라, 도산서원의 나무 이야기도

아직 마무리하기엔 이르니까요. 여유가 된다면 주중에, 혹시 짬이 모자라면, 다음 주에 안동의 봄 소식 담은 편지를 한 편 더 띄우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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