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찾아서] 고속도로 휴게소 동산에서 여행자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나무
[2013. 2. 19]
언 강이 풀리고, 초목에 싹이 트는 우수(雨水)였던 때문일까요. 어제 오늘, 이른 아침 바람은 차가웠지만 상큼했습니다.
이맘 때면 언제나 ' 유난히 혹독했던 ' 이라는 수식을 붙여 표현하는 ' 지난 겨울 ' 이 이제는 모든 걸 내려놓고 물러갈
채비를 마친 듯합니다. 이 즈음에 피어나는 납매, 풍년화 등은 물론이고, 남녘에서는 이미 변산바람꽃, 복수초 개화
소식이 밀려 옵니다. 지난 해 말부터 제게는 조금 벅차다 싶은 원고 작업에 매달려 온 두 달 남짓의 긴 방학도 이제
마무리해야 할 때입니다.
다시 새 봄맞이 채비에 나서야 합니다. 채 마무리하지 못한 밀린 원고 때문에 길 떠나는 일이 마뜩찮아도, 소리 없이
다가오는 봄 내음에 달아오른 몸은 어쩔 수 없습니다. 열 일 젖히고 오늘은 숲으로 들어가서 물 오른 흙 내음을 맡으렵니다. 언 땅을 뚫고 솟아오르는 여린 잎이 불러주는 생명의 노래에 한껏 귀 기울이고 오는 계절을 준비하며, 새해 소원을
가만가만 길어 올리겠습니다.
마을의 큰 나무들이 대개 그렇지만, 지난 겨울의 답사 중에 만났던 나무 가운데, 사람의 소원을 잘 들어주는 걸로
소문 난 큰 느티나무가 있습니다. 오가는 길에 들르기 좋은 고속도로 휴게소에 있는 나무여서 보신 분들이 많은 나무일
겁니다. 중부내륙고속국도를 타고 창원 방향으로 가다가 대구 즈음에 이르러 닿게 되는 현풍휴게소의 느티나무입니다.
오백 년 쯤 된 큰 느티나무이지요. 나무는 원래 마을 당산나무였습니다. 그때부터 이미 나무는 사람들의 소원을 잘
이뤄주는 훌륭한 나무로 소문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나무가 서 있는 마을 동산으로 고속도로가 나면서 나무는
휴게소 부지 안으로 편입되었지요. 휴게소 조성 당시를 기억하는 분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처음에는 동산을 완전히
갈아엎고 편의시설을 짓자는 의견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만큼 크고 아름다운 나무를 베어내기보다는 거꾸로 이 나무를 휴게소의 상징으로 세우는 테마 공원을
조성하는 게 좋겠다는 쪽으로 모두의 생각이 모아졌지요. 나무는 그래서 휴게소 건물 옆 낮은 동산 마루에 지금처럼
우뚝 서 있게 됐습니다. 사람들의 생각대로 나무는 현풍휴게소의 상징이 됐지요. 현풍휴게소의 소장 권대희 님은 기왕에
나무를 보존하기로 하는 김에 나무를 더 돋보이게 하고, 예전에 마을 사람들이 그랬듯이 더 잘 보호하는 방법을 궁리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나무가 서 있는 동산 구역을 아예 ‘느티나무 테마 공원’ 이라고 이름 짓고, 주변에 느티나무와 어울릴 만한
몇 가지 조형물을 설치했습니다. 이 느티나무의 가장 큰 특징이 사람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점이니만큼 분위기만으로도
그 특징을 알아 볼 수 있는 조형물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느티나무 동산 가장자리에 세운 솟대는 그런 이유에서
설치한 조형물입니다.
이 느티나무 동산에는 한 가지 특별한 조형물이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나무였던 느티나무가 이제
전국의 여행자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나무로 변신하기 위해 꼭 갖추어야 했던 설치물입니다. 바로 빨간 우체통입니다.
나무를 빙 둘러서 띄엄띄엄 여행자들이 편히 쉴 수 있는 긴 의자가 놓여 있는데, 큼지막한 우체통은 그 중에 햇볕 잘 드는 쪽의 긴 의자 곁에 놓았습니다. 편지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메일이 대신하는 이 시대에 보기 어려운 우체통입니다.
우체통 위에는 소원을 적는 엽서도 있습니다. 언제든 편안하게 나무 곁에 들렀다가 우체통 위의 엽서에 소원을 적어
우체통 안에 넣으면 소원이 나무에 전달된다는 겁니다. 배달부 역할을 자임한 건, 권 소장님을 비롯한 휴게소 직원들이지요. 우체통 안에 차곡차곡 쌓이는 여행자들의 소원 엽서는 수시로 거둬서 잘 보관해 왔습니다. 물론 느티나무가 사람의
문자를 이해하는 건 아니겠지요. 나무는 굳이 소원 엽서가 아니라 해도 가만히 나무 앞에 서서 두 손을 모으고 소원을
빌면 충분히 알아들을 겁니다.
현풍휴게소 느티나무는 대략 500년 쯤 된 나무입니다. 지금의 키는 13미터라고 안내판에 쓰여 있지만, 원래는 이보다
조금 더 컸을 것으로 보입니다. 공원을 조성하면서, 약간의 복토로 줄기의 일부가 흙 속에 묻힌 까닭입니다. 가슴높이
줄기의 지름은 1.6미터, 둘레로 환산하면 5미터를 넘는 크기인 거죠. 이 정도면 비슷한 나이의 다른 느티나무에 비해
조금 작은 듯하지만, 그래도 나무가 펼친 가지들은 사방으로 15미터를 넘어 매우 웅장해 보입니다.
어쩌면 동산 마루에 우뚝 서 있어서 실제 측정치보다 더 크게 보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나무를 바라보는 사이에 휴게소에 들렀던 지긋한 나이의 중년 부부 여행객이 나무를 찾아와 약속이라도 한 듯, 나무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뭔가 소원을
비는 기도를 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습니다. 나무 앞의 빨간 우체통 곁의 긴 의자에는 두 명의 젊은 여자가 찾아와 사진
몇 장을 찍고는 이내 엽서에 소원을 적기도 했습니다. 기억하건대, 이 날은 매우 추운 날이어서 바람이 찼지만, 나무를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간간이 이어졌습니다.
현풍휴게소의 권 소장님께 부탁해서, 그 동안 모아 둔 소원 엽서를 볼 수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소원을
적어 우체통에 넣었더군요. 물론 장난 기 섞인 엽서가 없었던 건 아닐 겁니다. 그러나 상자 가득 모아둔 엽서에는 참으로
간절한 소망들이 빼곡히 담겨 있었습니다. 어린 아이에서부터 노인까지 남녀노소 따로 없이, 하나하나가 모두 자신의
생활 속에 꼭 필요한 소망들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간절한 소원들이었습니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 쉬 싸지 않게 해 주세요. " 라고 적은 엽서가 있는가 하면, 자녀들의 취업이 하루 빨리 이뤄지기를
바란다는 단정한 어른 글씨의 엽서도 있었지요. 또 병환으로 돌아가신 아버지가 저승에서만큼은 아프지 않고 편안하실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젊은 여인의 글씨로 보이는 엽서도 있었습니다. 특이하게도 어떤 경우에는 집에 돌아가서,
현풍휴게소 느티나무 앞으로 보내온 편지도 있었습니다.
권 소장님도 처음에는 이처럼 많은 엽서가 쌓이리라고 생각지 못 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게다가 엽서에 적힌 사연들은 그냥 허투루 넘기기 아까운 사연들이었습니다. 때로는 미소를 띄우게 하는 평안한 소원이었지만, 가슴을 찡하게 하는
절박한 사연도 적지 않다는 게 소장님의 이야기입니다. 이 사연들을 잘 모아서, 더 많은 분들과 이 아름다운 엽서를 함께
나누어 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보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고속도로가 뚫리면서 하마터면 사라질 뻔한 느티나무가 이제는 마을사람의 나무에서 우리 모두의 나무로 역할을 바꾸었
습니다. 그건 나무를 수굿이 바라본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하는 개발 과정이지
만, 한 그루의 나무라도 더 소중하게 지키고 오래 가꾸려는 노력이 있었던 때문입니다. 마침내 오백 년을 조용한 시골
마을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던 나무는 이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어야 하는 벅찬 나무가 되었습니다.
설 명절도 지나고 봄을 알리는 절기인 ‘우수’도 지났습니다. 여러분들은 올해 무슨 소원을 세우셨나요?
가만히 땅 밑에서 울려오는 생명의 약동 소리를 들으며 큰 소망 모두 이루시기를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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