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찾아서] 꽃이 피어 아름답고 나무가 있어 행복한 계절이……
천리포수목원의 고운 봄 햇살을 받고 피어있는 무스카리.
[2013. 5. 13]
거개의 풀꽃이나 나무들이 순간적인 눈맞춤만으로 곁을 주지 않습니다. 들숨 날숨의 리듬이 다른 데다 그들 곁을 흐르는
시간의 흐름이 사람과 판이한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식물과 진정 어린 느낌을 나누려면 침묵을 품고 흐르는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게다가 꽃잎 안쪽에서 하늘거리는 자디잔 꽃술과, 여린 꽃잎 위에 흐릿하면서도 또렷이 새겨진 푸르거나
붉은 꽃잎의 핏줄을 자세히 바라보는 세심함도 곁들여야 합니다. 그건 거의 모든 풀과 나무가 똑같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아주 짧은 순간에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작은 풀이나 나무도 있습니다. 큰 나무 그늘을 살짝 벗어나
환한 햇살을 한가득 품고 피어있는 무스카리 꽃 무리도 그렇습니다. 흔치 않은 새파란 빛깔의 꽃잎과 깊어가는 봄 햇살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목원으로 불리는 천리포수목원의 숲에서 지어낸 환상적인 풍경입니다. 굳이 무스카리를 찾아보겠다
고 나선 건 아니라 해도 이 즈음에 파란 빛으로 피어나는 무스카리는 지나는 이의 발길을 옴쭉달싹 못하게 합니다.
Leonard Messel 이라는 이름을 가진 별목련 종류의 하나.
목련 종류의 나무에 관한 한 세계적인 규모로 알려지긴 했어도 천리포수목원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목련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봄이면 환상적인 개화로 온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목련 꽃이 눈길을 끄는 건 사실입니다. 흰 색의 꽃을 피우는
목련에서부터 붉은 색 꽃의 자목련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의 여느 곳에서 볼 수 없는 노란 색 꽃을 피우는 목련, 그리고 길쭉한
꽃잎이 여러 장 겹쳐 피어나는 별목련과 큰별목련 등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목련 꽃들이 지어내는 수목원 풍경은
어느 봄이라도 환상적입니다.
그러나 그 목련들의 매혹적인 자태에만 눈길을 모으다 보면 천리포수목원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놓치기 십상입니다.
천리포수목원이 아름다운 건 뭐니뭐니 해도 1만 5천 종류의 식물들이 아주 오래 전부터 이 자리에서 자라났다는 듯이 매우
자연스럽게 서로 어울리며 빚어내는 자연스러움이지요. 목련 그늘 아래에서 표찰도 없이 피어나는 작은 풀꽃들의 생명 노래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낙화한 목련 꽃잎이 흩어져도 여느 곳에서의 목련 낙화처럼 불편하지 않을 수 있는 비밀입니다. 단
언컨대, 천리포수목원에서는 도시의 콘크리트 길 위에 떨어진 목련 꽃잎을 바라보면서 느껴야 했던 처참함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큰 연못 가장자리에 서 있는 천리포수목원의 명물인 빅버사 목련.
모두가 목련의 불편한 특징으로 꼽는 낙화 뒤의 풍경조차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 천리포수목원의 진정한 아름다움입니다.
목련 꽃의 낙화는 이미 예정된 순서입니다. 목련 곁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다른 나무들은 물론이고, 그의 그늘 아래에 자리잡고
피어나는 작은 풀꽃들은 서로의 개화에서부터 낙화까지의 모든 순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데에서 비롯된 풍경입니다.
자연스러운 순환의 이치를 천리포수목원의 모든 식물들이 말 없이 아주 편안하게 받아들입니다. 사람이 지었으나, 사람의
손길을 느끼기 어려울 만큼 자연 그대로의 느낌을 느낄 수 있는 숲이라는 게 바로 천리포수목원의 진정한 아름다움입니다.
목련 꽃 피어나는 천리포수목원의 봄은 그래서 언제나 관람객으로 북적입니다. 번거롭습니다. 침묵 속에서 목련 꽃이 들려주는
우주의 신비 이야기를 듣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어서 안타까움이 적지 않습니다. 나무들도 풀꽃들도 피곤하긴 마찬가지일
겁니다. 관람객이 모두 떠난 저녁 늦은 시간 되어야 비로소 온 종일 카메라 셔터음 앞에서 긴장을 풀지 못하던 큰별목련도 겨우
휴식 시간에 이릅니다. 천리포 앞 서해로 지는 태양이 풀어놓는 노을 빛이 유난히 편안해 보이는 까닭입니다.
노란 색의 싱그러운 꽃을 피우는 엘리자베스 목련.
천리포수목원에는 사백 여 종의 목련이 있습니다. 제가끔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가진 이 많은 종류의 목련들의 이름을
하나 하나 외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지난 십오 년 동안의 봄날 대부분을 이 숲에서 보내온 저로서도 그저 특별한
몇 종류들만의 이름을 거칠게 기억할 뿐이지요. 그야말로 '자연을 아는 것은 자연을 느끼는 것의 절반만큼도 중요하지 않다'고
이야기한 레이첼 카슨 선생의 말씀이 천리포수목원 숲에서야말로 꼭 기억해야 할 이야기일 겁니다. 바라보이는 그대로 느끼고 그들의 아름다움에 경탄하는 것이 먼저 필요한 일입니다.
제가 그 많은 목련 가운데 특별히 기억하는 목련으로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의 목련이 있습니다. 그를 한번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름을 기억할 수밖에 없을 만큼 인상적인 때문이지요. 노란 색 꽃을 피우는 종류의 목련이지요. 우리나라에는 흔치
않아도 노란 색 꽃을 피우는 목련이 여럿 있어서 편의상 그들을 한꺼번에 ‘황목련’이라고도 부릅니다. 황목련 가운데에도
엘리자베스는 매우 인상적입니다. 대개의 황목련이 잎과 꽃이 함께 피어나지만, 엘리자베스는 잎 나기 전에 꽃이 먼저
피어나서 그의 노란 색 꽃이 더없이 싱그러워 보이는 때문입니다.
G-66-952 라는 기호로 식별하는 목련 종류.
올 봄 천리포수목원 목련의 개화 사정은 예년에 비해 조금은 혼란스러웠습니다. 목련 꽃이 피어나기 위한 채비로 한창
바빠야 했던 지난 삼월부터 사월까지의 날씨가 목련에게는 치명적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아예 춥거나 더웠던 게 아니고,
추웠다가 갑자기 따뜻해지거나를 대책없이 반복하는 탓에 개화 채비에 나섰던 목련으로서는 필경 몸살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하늘이 주는 만큼만 살을 찌울 수 있는 식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어려운 날씨 탓에 목련의 개화 시기가 예년과 적잖이 달랐습니다. 심지어 여느 때라면 함께 꽃을 피우던 나무조차도 지난
봄에는 시기를 달리해 피어났지요. 햇살을 좀 더 많이 받는 목련에서는 꽃을 피웠지만, 다른 나무는 아직 감감무소식이기도
했지요. 게다가 비교적 개화 시기가 늦은 천리포 지역이지만, 올해는 여느 해보다 많이 늦어졌다는 것도 그랬습니다.
자목련 품종 가운데 많은 나무들이 대개 오월 들어서 활짝 피어나기까지 했습니다.
날씨가 짓궂었던 이 봄에 천리포수목원에서 가장 아름답게 꽃을 피운 진달래.
목련이 몸살을 치러야 했던 지난 봄, 천리포수목원을 더 아름답게 한 나무는 무엇보다 진달래였습니다. 우리네 봄 들녘
어디에서라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진달래는 짓궂은 봄 날씨에도 아랑곳하지않고 환한 보랏빛 꽃을 피웠습니다. 여느 해보다
더 예쁘게 수목원 곳곳에서 이 봄을 화려하게 밝혔습니다. 굳이 학명을 적은 표찰로 표시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우리네에게
친숙한 우리 나무 우리 꽃이 이토록 아름답게 수목원 곳곳에서 봄 노래를 우렁차게 불러젖혔습니다. 진달래가 여느 나무에
비해 생명력이 강한 나무라는 걸 이 봄에 또렷이 보여준 셈입니다.
목련 꽃의 아쉬움을 진달래가 달래준 우리의 봄이 빠르게 지나갑니다. 이제 한낮의 날씨는 초여름에 닿았습니다. 가볍게 입은
옷조차 한낮에는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고, 목줄기에 땀이 배어듭니다. 집 앞의 개나리 노란 꽃은 이미 다 떨어졌고, 그 자리에
연둣빛으로 피어난 새 잎은 초록으로 짙어졌습니다. 천리포수목원의 목련, 진달래에 머물렀던 마음도 차츰 여름을 준비해야
하는 계절입니다.
천리포 앞 바다로부터 밀려온 해무를 품은 큰 연못 풍경.
지난 겨울의 적막을 뚫고 봄을 노래한 숱하게 많은 봄꽃들의 노래 가운데에 채 전해드리지 못한 노래들이 많이 있습니다.
천리포수목원 숲에 지천으로 피어났던 다양한 종류의 수선화를 비롯해 언제 봐도 귀여운 미소로 바라보는 사람과 눈을 맞추는
앵초, 넓은 잎사귀 위에 오똑하게 꽃을 피운 우산고로쇠, 무뚝뚝하게 낮은 자리를 지켜주는 수호초의 데면데면한 하얀 꽃 송이,
살포시 깃을 젖히고 속살을 드러낸 여러 종류의 히어리 꽃, 올 봄 진달래 못지 않게 풍요로운 개화를 보여준 마취목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나무들이 있습니다.
그게 어디 수목원 뿐이겠습니까. 도심에서도 흰 색과 분홍 색으로 피어 온 거리에 알싸한 향기를 뿜어내던 라일락, 밥풀데기를
다닥다닥 붙인 듯한 모양으로 피어난 짙은 보라색의 박태기나무, 이 즈음까지 길가 낮은 자리에 점점이 피어난 노란 빛의
애기똥풀과 씀바귀 꽃, 복숭아 과수원을 갈아엎고 지은 아파트 단지에서 피어난 복사나무 꽃, 그리고 아기 손처럼 앙증맞은
잎사귀 아래에 숨어서 자잘하게 피어난 단풍나무 꽃 등 우리 사는 곳 어디에라도 나무들이 불러주는 봄 노래가 지난 봄 내내
행복하게 했습니다.
도심 길가에서 우연히 만난 모과나무의 꽃 송이.
벚꽃 진 자리에 조롱조롱 맺힌 버찌 열매가 서서히 익어갑니다. 그 곁에 서 있는 몇 그루의 모과나무에서는 다홍 빛 꽃송이가
다문다문 입을 열었습니다. 봄 가고 여름 와도 우리 곁 어디에라도 꽃을 피우는 나무들이 있어서, 새 아침은 언제나 행복합니다.
고맙습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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