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이야기

[나무를 찾아서] 잔인한 도시에서 서럽게 사라져간 자디잔 풀꽃들이여!

s덴버 2013. 5. 16. 13:27

[나무를 찾아서] 잔인한 도시에서 서럽게 사라져간 자디잔 풀꽃들이여! 
 

 

 

  눈에 잘 뜨이지 않는, 그래서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에 채이며 모진 삶을 이어가는 여린 풀꽃들의 장한 아우성을 '나무 편지'에 담아

띄우던 그 날 저녁이었습니다. 어둠이 깔린 거리를 걸으며 '나무 편지'에서 그토록 아름답고 장한 생명이라고 이야기했던 작은 풀꽃

들을 한번 더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그들의 새살거림을 마음 깊이 품은 까닭에 더 살갑게 만날 수 있지 싶었지요. 그래서 걸음의

속도를 늦추었습니다. 그런데 아뿔싸! 그 모든 작은 풀꽃들이 남김없이 사라졌습니다. 한 송이 한 촉 남지 않았습니다. 작업실에

앉아 사진에 담은 풀꽃들과 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작업실 바로 옆 길가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노란 꽃술을 품은 앙증맞은 꽃다지 꽃도, 꽃다지 꽃을 닮았으면서도 하늘 빛을 품은 파란 꽃술로 사뭇 다른 생김새를 드러낸

꽃바지 꽃도, 가느다란 줄기를 불쑥 솟아올리고 줄기 끝에서 순백의 꽃을 피운 냉이도, 낮은 자세로 올망졸망 모여 앉아 바라보는

사람이나 귀 기울이는 사람 없어도 자기들끼리 봄 노래에 부산하던 봄맞이꽃도, 잔털을 소복히 달고 무성하게 돋아났던 점나도

나물도, 그리고 푸른 잎을 돋우고 보랏빛 꽃을 피울 채비에 한창이던 엉겅퀴도, 보도블록 틈새를 뚫고 솟아올랐던 노란 민들레 꽃도,

늘어진 흰 꽃잎으로 다문다문 길 가장자리를 환하게 밝히던 흰제비꽃도 가뭇없이 사라졌습니다. 


 

 
   도로 변에서 제초 작업이 있었던 겁니다. 힘겹게 틔운 작은 생명들은 단 하나의 흔적조차 남지 않았습니다. 이 광경을 놓고, 도시

경관이 단정해졌다고 말해야 할까요? 이런 걸 깔끔해졌다고 혹은 단정해졌다고 이야기해야 하나요? 도무지 어찌 해야 할 바를 알 수

없었습니다. 그냥 무너앉듯 어두운 길가에 멈춰섰습니다. 그 작은 생명들과 더불어 사는 방법이 도시에는 정녕 없는 것일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는 생각 뿐입니다. 온통 시멘트와 보도블록 투성이여서 더 이상 그 작은 생명들이 사람들의

발걸음을 훼방할 가능성도 없습니다. 모두가 일쑤 도시인들의 발길에 짓밟히며 스러져가는 작은 생명들입니다. 아스팔트와 보도

블록, 그리고 보도블록들 사이의 그 작은 틈새조차 허락하지 못하는 도시의 잔혹한 단정함 혹은 잔인한 깔끔함이 야속했습니다.
 

 

   말문이 막혔고, 가슴이 아팠습니다. 방금 전에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재잘거리던 풀꽃들의 꼬무락거림이 가슴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며 뭉클 솟아올랐습니다. 공연한 호들갑일까요? 그들이 사라진 자리를 아무 느낌 없이 그냥 떠날 수 없었습니다. 이른 아침,

따사로운 햇살을 기다리며 아직 꽃잎을 덜 열었던 점나도나물이 방긋 펼칠 웃음을 기다리며 설레던 날들은 이리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아프게 사라져가며 삼켜야 했을 작은 생명들의 소리 없는 울음이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나왔습니다. 이 잔인한 도시의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서러웠습니다.
 

 

   지천으로 흐드러졌던 냉이, 꽃다지, 꽃바지, 점나도나물이 모두 사라졌다고 소리내어 울 수도 없고, 누구에게 이야기할 수도

없습니다. 그저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도시의 잔혹함이 서러웠습니다. 땅바닥에 엎드려 오랫동안 속닥거리던 자디잔 봄꽃들의

아우성은 이제 다시 들을 수 없게 됐습니다. 사랑하는 것을 잃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기력이 서글펐습니다. 도시 정화

사업으로 했다 할 '제초작업'의 희생으로 사라진 나의 봄꽃들의 슬픈 운명을 어찌 해야 하는지요. 아직 채 떠나지 않은 이 봄 내내

 잔혹의 도시에서 이제는 무얼 바라보며 혹은 무얼 기다리는 설렘을 안고 이 봄을 지내야 할지요. 
 

 

   봄의 장한 생명들이 불러준 사랑노래를 잃은 도시에서 무슨 염치로 여름의 녹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안타까운 마음은

쉬이 추스러지지 않습니다. 오가는 도시의 희뿌연 매연을 함빡 뒤집어쓰고도 이참이면 어김없이 하?게 꽃잎을 열고 분주히 걷는

사람들을 말끄러미 바라보던, 그 사랑스러운 풀꽃들을 이 봄에는 다시 볼 수 없게 됐습니다. 봄바람 불어오면서 이른 아침 길을

나설 때마다 이 자디잔 생명들이 새물새물 들려주는 나지막한 생명의 노래를 바라보던 즐거움은 댕강 잘렸습니다. 사랑을 잃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니요. 도시는 어쩌면 그들을 잃은 서러움마저 성가셔 하겠지요.
 

 

   가만히 길 위에 쪼그리고 앉아 풀꽃들이 솟았던 보도블록 틈바구니를 들여다 보았습니다. 아예 뿌리까지 뽑아낸 그 자리는

움푹 파이기까지 했습니다. 가로 세로 구획이 또렷한 도심 한가운데에 뿌리를 내린 그들은 처음부터 이같은 잔인한 최후를 맞이할

운명이었을 겁니다. 울타리 안쪽에서는 희거나 붉은 철쭉이 한창 화려하게 피어있고, 그보다 조금 위쪽으로는 박태기나무와

라일락의 붉은 꽃이 가로등 불빛을 받아 반짝이지만, 사라진 풀꽃들의 새살거림은 다시 들을 수 없게 됐다는 게 아쉬웠습니다. 
 

 

   흰제비꽃, 꽃바지, 봄맞이꽃, 꽃다지, 냉이, 점나도나물, 꽃마리. 하릴없이 사진에 담아두었던 작은 풀꽃들의 이름을 소리내어

불러봅니다. 잔인한 도시에서 한 살이를 채 마치지 못하고 참혹하게 죽어간 여린 생명들의 이야기에 다시 한번 귀 기울이는 게 지금

할 수 있는 전부이겠네요.

 

고맙습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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