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찾아서] 봄 향한 그리움의 속도를 한껏 늦추어야 하는 입춘 아침
[2013. 2. 4]
봄을 일으켜 세우려고, 겨울이 품고 있던 흰 눈을 남김없이 내려놓았습니다. 이른 아침, 아직 채 아무도 지나지 않은 눈길을 걷자니, 발목 위까지 쌓인 하얀 눈이 신발 안으로 스며듭니다. 신발 안쪽이 촉촉히 젖어들지만, 발은 시렵지 않습니다. 그저 '눈이 많으니
올엔 꼭 풍년이 들겠지'라는 말만 되뇌며, 자박자박 하얀 눈을 밟으며 천천히 걷습니다. 입춘 날 아침의 폭설은 봄 향한 그리움의
속도를 잠시 늦추어 놓습니다.
그래도 남녘의 봄 소식은 뚜렷합니다. 제주도 올레 길섶의 붉은 동백나무 꽃은 지금 한창입니다. 더러는 벌써 낙화를 마쳤습니다. 영상 십도를 넘나드는 한낮의 제주 날씨는 두꺼운 외투를 벗어 들고 걷게 했습니다. 하염없이 걸었던 제주 올레의 봄 표정은 상큼했습니다.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이 즈음 제주의 바닷가 올레에는 동백나무 꽃 뿐 아니라, 온갖 봄꽃이 한창입니다. 유채를 닮은 노란 배추꽃, 다산이 금잔옥대로 부른 주홍 빛 수선화, 제비가 돌아올 때 피어나는 보라빛 제비꽃, 다문다문 샛노란 민들레 꽃까지.
봄이 가장 먼저 찾아오는 곳, 제주도에는 겨울과 봄 사이에 또 하나의 계절이 있습니다. 폭설로 봄의 걸음걸이를 잠시 늦춘 이 즈음의 계절이 그렇습니다. 겨울은 분명 아니지만, 봄이라 하기에는 아직 이른, 그런 계절입니다. 제주의 나무를 찾으면, 계절의 흐름을 잊는 까닭입니다. 육지에서는 잎 떨군 나무에서 아직 채 새 눈이 트기도 전이지만, 제주의 나무는 짙은 초록이 터널을 이룹니다. 육지에는 그리 흔치 않은 난대성 나무들이 많은 제주 올레의 유난스런 풍경입니다.
모든 길 위에 하얀 눈 소복히 쌓였어도 바람은 맵지 않습니다. 이 눈은 겨울이 품었던 매운 바람을 모두 내려놓고, 새 봄의 예쁜 꽃들의 표정을 더 선명하게 보여주려는 겨울의 작별 인사입니다. 봄 눈, 입춘 아침의 서설을 그래서 서설(瑞雪)이라 이야기하게 됩니다. 온 누리가 평안하기를 바라는 입춘 날 아침입니다.
고맙습니다.
원본출처 : http://www.solsup.com , 고규홍(gohkh@solsup.com)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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