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이야기

[나무를 찾아서] 이 땅을 지켜온 아주 오래 된 벚나무 한 그루

s덴버 2016. 4. 18. 15:34

[나무를 찾아서] 이 땅을 지켜온 아주 오래 된 벚나무 한 그루




  비 내리자 벚나무 가지에 몇 남아 있던 꽃송이까지 다 떨어졌습니다. 갓 피어난 꽃도 아름답지만

그 못지않게 낙화가 아름다운 꽃이 벚꽃입니다. 나무의 수명을 단언하기 어렵습니다만 대개의 경우

화려한 꽃을 많이 피우거나 큼지막한 열매를 많이 맺는 나무는 그리 오래 살지 못합니다.

벚나무도 그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오래 된 벚나무라고 해 봐야 대략 1백 년 안팎이 고작입니다.

지금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벚나무 가운데에 가장 오래 된 벚나무는 삼백오십년 쯤 된 것으로

짐작하는 지리산 구례 화엄사에 있는 올벚나무입니다. 지난 주 [나무편지]에서 예고해 드린

'궁극의 벚나무'가 바로 그 나무입니다.



  천연기념물 제38호로 지정해 보호하는 구례 화엄사 올벚나무 이야기입니다. 올벚나무는 벚나무

종류의 하나입니다. 우리나라에 사는 벚나무 종류로는 왕벚나무를 비롯해 산벚나무, 털벚나무 등

16종이 있습니다. 올벚나무도 그 가운데 하나이지요. 그러나 벚나무 종류를 구별하는 건 사실 매우

어렵습니다. 각각의 특징이 분명히 존재하기는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 나무를 살펴보면 일쑤

헷갈리곤 합니다. 올벚나무는 꽃받침통의 아랫부분이 넓다는 특징이 있다고 돼 있으나,

미세한 구분은 전문가들의 도움을 빌리지 않으면 쉽지 않습니다.



  천연기념물 이름이 구례 화엄사 올벚나무이기는 하지만, 이 나무는 화엄사 경내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화엄사 경내에 오르기 바로 전에 자리한 지장암 뒷 동산 기슭에 서 있으니까요. 지장암은 비구니 스님이

계신 작은 암자입니다. 지장암 올벚나무를 삼백오십 살 정도 된 것으로 보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때는 대략 병자호란 직후인 인조 재위 시기를 가리키는데, 당시 화엄사에 주석하셨던 벽암스님이

심었던 여러 나무 가운데 하나라고 추측하는 겁니다.



  오랑캐의 난을 겪은 뒤 인조는 전쟁에 대비한 무기를 확보하기 위해 전국에 무기의 재료가 될 나무를

많이 심으라고 했습니다. 당시 벽암스님은 인조의 뜻을 받들어 절집 주변에 벚나무를 여러 그루 심어

활의 재료로 삼으려 했다고 합니다. 지장암 올벚나무는 그때 심은 여러 그루의 벚나무 가운데 한

그루라고 합니다. 다른 여러 그루의 나무는 모두 사라지고 오직 한 그루가 남은 겁니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게 1636년이고, 벽암스님이 소천하신 게 1660년인 걸 감안해서, 대략 삼백오십년 전 쯤에

심은 나무로 짐작하는 것입니다.



  나이도 오래 됐지만 규모도 여느 벚나무에 비해 훨씬 큰 편입니다. 높이가 12미터 쯤 되며,

뿌리부분 둘레는 4.5미터 정도 됩니다. 가슴높이 줄기둘레를 이야기하지 않고, 뿌리부분의 둘레를

이야기한 건, 나무 줄기가 뿌리부분에서부터 둘로 갈라져 자랐기 때문입니다. 줄기둘레를 측정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줄기 한쪽으로 뻗었던 또다른 굵은 줄기 한 쪽은 오래 전에 부러져 흔적도

없지요. 그래서 줄기의 한쪽 면에는 매우 큰 외과수술 부위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한 줄기가 사라진 바람에 조금은 빈약해 보이기도 합니다만, 이 정도면 여느 벚나무에 비해

훨씬 큰 규모입니다.



  이 봄, 닷새 간격으로 두 차례에 걸쳐 찾은 이 오래 된 벚나무에 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나무를 처음 만나는 건 아닌데, 이처럼 무성하게 꽃을 피운 모습을 본 건 올 봄이 처음입니다.

다른 나무에 비해 늘 꽃이 적어 바라볼 때마다 적잖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요. 이제 자손을

번식하는 생식능력이 떨어진 건 아닌가 해서 그랬습니다. 그런데 올 봄에 피어난 꽃은 주변의

여느 벚나무에 비해 가장 화려하다 해도 될 만큼 무성했습니다. 천연기념물 보호 차원에서 보다

당국의 세심한 관리가 효과를 본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살아온 긴 세월의 풍진은 나무 줄기에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한눈에도 그가 살아온 긴 세월이

느껴집니다. 나무 줄기의 거의 모든 표면에는 푸른 이끼가 잔뜩 올라와 있고, 그 한쪽 틈에는 제비꽃이

뿌리를 내리고 보랏빛 꽃을 피우기도 했습니다. 한 그루의 나무이건만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주변의 다른 생명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힘겹게 살아온 세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토록 아름다운 꽃을 피운 벚나무의 생명이 고마울 따름입니다.



  오랜만에 긴 밤을 꼬박 새웠습니다. 다음 주 쯤에 나올 새 책의 최종 교정을 보느라 그랬습니다.

《슈베르트와 나무》라는 제목으로 나올 책입니다. 제목이 조금은 생뚱맞아 보이지요?

그래서 제목 아래에 부제를 함께 넣기로 했습니다. 아직 확정한 것은 아닌데, 아마도 '나무 인문학자와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 몸으로 나무를 보다' 가 될 겁니다. 그간 [나무편지]를 통해 지난 일년 동안

제가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와 나무를 관찰하러 다녔다는 말씀은 얼핏 올린 듯합니다.

새 책은 바로 그 피아니스트와의 나무 답사 과정을 기록한 것입니다.



  '시각장애인은 나무를 어떻게 볼까' 하는 의문을 풀어가려 애쓴 지난 일 년 동안의 작업에는 매우

큰 보람이 있었습니다. 제가 짐작조차 하지 못한 나무 관찰법을 그녀를 통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다음 주에는 책이 나올 것이고, 그 다음 주에는 이 작업 과정을 영상으로 담아 '한반도 대서사시 - 나무'

라는 큰 제목을 달고 EBS에서 '다큐프라임'으로 방영될 것입니다. 책과 방송은 확정되는 대로 다음

[나무편지]에서 더 알려드리겠습니다. 끝으로 이 작업을 통해 건져올린 여러 메시지 가운데 하나를

전해드리며 이 아침의 [나무편지]는 마무리하겠습니다.


  "시각을 내려놓으니 촉각이 일어나고, 청각이 살아났으며, 후각이 요동쳤다. 그리고 사유가 시작됐다."


- 이 땅을 지켜온 큰 나무, 그 곁에 다가서기 위하여 ……


4월 18일 아침에 솔숲(http://solsup.com)에서 고규홍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