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이야기

[나무를 찾아서] 피어나는 여린 꽃잎 …… 침묵에서 건져올린 생명의 알갱이

s덴버 2016. 4. 4. 09:58

[나무를 찾아서] 피어나는 여린 꽃잎 …… 침묵에서 건져올린 생명의 알갱이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실마리를 찾지 못해 [나무편지] 스케치북과 노트를 펼쳐놓고,

한참을 머뭇거립니다. 지난 계절 동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예쁘게 예쁘게 피어나는 꽃봉오리들을

바라봅니다. 스케치북에 담기 전, 며칠 전의 나무 앞에서도 그랬습니다. 보솜한 솜털 이불을 살며시

들추고 얼굴을 내밀려 애쓰는 꽃봉오리들의 속살을 바라보는 동안 옴쭉달싹도 못했습니다.






  여린 꽃잎이 들려주는 지난 계절의 생명 이야기를 들으려 하냥 바라보았습니다. 아무 것도 할 게

없었습니다. 그냥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예쁠 수가 있을까요. 꽃봉오리 껍질을 벗겨내느라

안간힘하는 꽃잎의 가는 떨림이 분명하게 바라다보였습니다. 아직 채 봄의 문이 열리지 않아

쪼글쪼글한 채인 꽃잎입니다. 따스하게 피어나는 봄 햇살을 살피려 실눈을 흘기는 듯한 꽃잎이

바라보는 사람의 눈에 마주칩니다.






  처음엔 꽃잎에 고정한 사람의 눈길이 뜻밖이었는지 멈칫하는 듯하다가 이내 미소를 띄웁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긴 겨울 동안 기다렸던 꽃잎을 온전히 펼쳐보이겠노라 침묵으로 고요하게 속 싶은

말을 전해옵니다. 꽃봉오리 곁으로 봄볕 머금은 바람이 스쳐듭니다. 그 바람이 마냥 좋아 꽃봉오리

솜털이불이 넘실거립니다. 꽃봉오리 껍질 이불 속의 붉은 꽃잎이 다시 또 움찔 거리며 꽃봉오리

바깥 쪽을 흘긋거립니다.






  고작해야 닷새 전에 찾아본 숲의 목련 꽃봉오리들의 앙증맞은 모습입니다. 곳곳에 목련 꽃봉오리들이

이미 하얗게 벙그러졌습니다. 남몰래 꽃봉오리를 화들짝 열었을 그 어느 날 밤의 침묵이 그려집니다.

아침 오기 전에 꽃송이를 환하게 단장하느라 긴 밤 내내 애면글면 재우쳤을 세상의 모든 나무들의

봄노래가 고맙습니다. 봄이 그렇게 우리 곁에 또렷하게 다가왔습니다.






  공책에 시 한 수 베껴 썼습니다. 목은 이색의 시 중에 눈에 띈 귀절이 있습니다.

“天地元來出靜中” 세상의 온갖 꽃들이 피어나는 풍광을 홀로 문 닫고 바라보던 시인이 푸른 꽃

붉은 꽃이 피어나는 광경에서 도의 맛(道味)를 노래한 시입니다. 칠언절구의 그 시 마지막 행에서

그는 온 천지는 본디부터 바로 고요 속에서 피어난다는 걸 새삼 노래하고 싶었던 겁니다.

고요 속에서 태어난 천지, 침묵으로 피어나는 봄의 꽃.






  지난 주부터 유난히 시끄러워진 세상의 소음들 사이에 봄의 적요가 있습니다.

그 안에서 피어나는 작은 꽃들의 환한 외침에 귀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걸작 ‘침묵의 세계’를 남긴

오스트리아의 막스 피카르트는 ‘침묵에서 건져올린 언어가 아니라면 그건 공허할 뿐이며, 소음이고 잡음’

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침묵 속에서 생명의 알갱이를 드러내고 있는 꽃 한 송이의 여린 잎을

바라보아야 할 이유입니다.






  서둘러 행장을 꾸려 길 위에 올랐습니다. 주말에 [KBS 클래식 FM]의 심야 생방송을 마치고 곧바로

남녘 지리산을 향해 떠났습니다. 힘겹게 긴 시간을 살아온 이 땅에서 가장 오래 된 벚나무를 만나려는

길입니다. 잔뜩 흐린 하늘 아래 펼쳐진 길가에 벚나무에서 피어난 환한 봄꽃들이 구름되어 반겼습니다.

긴 세월 동안 너무 많은 꽃을 피워 이제는 꽃 피우기에 지친 한 그루의 늙은 벚나무의 안부가

궁금했습니다. 그러나 오래된 그 벚나무는 뜻밖에도 참 많은 꽃을 아름답게 피웠습니다.






  나무의 기특한 안간힘이 더 없이 고마웠습니다. 지리산 높은 봉우리에서 천천히 밀려오던 구름이

드디어 비를 흩뿌렸습니다. 비를 맞으며 나무를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이 곳 지리산 자락의 나무 소식은

다음 나무편지를 통해 전해드려야 하겠습니다. 벚나무 뿐 아니라, 보여드려야 할 지리산 나무의 소식은 

많습니다. 모두 꽃처럼 나무처럼 평안하십시오!


- 지리산 자락 오래된 벚나무 곁에서 비를 맞으며 ……
솔숲(http://solsup.com)에서 고규홍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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