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생각] 나무를 본다는 것…… 그 뜻 깊은 화두를 다시 일으킵니다.
내일 화요일에는 비가 오면서 날씨가 조금 나아진다고 합니다.
오월의 볕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참 뜨거운 날입니다. 그래서 꽃들도 조금 일찍 피었으리라 짐작하고
몇 해 동안의 나무 답사 일지를 찾아보았습니다. 올해 목련 개화 시기가 열흘 쯤 빨랐던 걸 생각하니,
더 그럴 줄 알았지요. 그런데, 만병초의 개화 시기는 지난 해나 그 전 해나 큰 차이가 없네요.
몇 해 동안의 일지를 보아도 대략 오월 중순에서 피어나 유월 초순까지 화려하게 사람의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사람이 느끼는 날씨와 나무가 느끼는 날씨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는 모양입니다.
만병초라는 이름은 만병을 끌어오기 때문이 아니라, 만병을 치료하기 때문에 붙었습니다.
진달래과의 나무여서 만병초의 꽃은 진달래나 철쭉을 닮았습니다. 그러나 열 송이에서 스무 송이나 되는
많은 꽃송이가 가지 끝에 모여 피어나기 때문에 매우 화려한 꽃을 보여줍니다.
우리나라 전국의 산 중턱 부분에서 잘 자라는 나무이며, 한방에서는 거풍이나 강장 이뇨 등은 물론이고,
통증을 멎게 하기 위한 약재로 요긴하게 쓰는 나무입니다. 그러나 봄 지나며 여름을 맞이해야 할 이 즈음에
이토록 화려한 꽃을 오래 바라보고만 있으면 몸과 마음의 병이 차츰 가라앉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보기에 좋은 꽃인 게 사실입니다.
‘나무를 본다는 것’ 나아가 ‘본다는 것’이라는 뜻 깊은 화두를 그래서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지난 번 [나무편지]에서 말씀드렸듯이 오늘의 [나무편지]에서도 새 책 《슈베르트와 나무》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이 책에서 집어 든 가장 큰 화두가 바로 ‘본다는 것이란 무엇인가’였습니다.
이 프로젝트를 함께 한 사람이 바로 시각장애인 피아니스트 김예지씨여야 했던 가장 중요한 이유이지요.
‘본다는 것’의 뜻을 탐색하기 위해 시각장애인을 찾았다는 것부터 생뚱맞은 혹은 터무니없는 생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그게 오래 된 생각이었습니다.
이 책의 머릿말에도 분명 이 작업이 얼마나 터무니없이 시작했던가를 맨 앞에 썼습니다.
〈 터무니없어 보이는 이 작업을 마음먹은 건 오래전이다. 어쩌면 나무를 찾아다니기 시작할 때부터 품은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길 위를 떠돌아 나무를 만나고, 탐욕적으로 글을 써 젖히던 무렵,
나무 이야기를 한창 풀어놓고 나면 늘 아쉬움이 남았다. 과연 내가 글로 표현해낸 게 그 나무의 전부인가.
나무는 그 정도의 글로 다 표현된 것인가.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나는 과연 나무를 제대로 본 것인가.
내가 보지 못한 건 나무의 무엇인가. 나무를 제대로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려면 뭘 더 써야 하는가.
대관절 나무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
그러던 중에 우연히 듣게 된 라디오 청취자의 사연이 있었습니다. 석굴암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온
어느 맹학교 선생님의 감동적인 사연이었습니다. 해가 뜨기도 전에 석굴암에 도착한 선생님은
아이들을 자리에 앉혀놓고, 주변 풍광을 언어로 그려 아이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 아침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이른 새벽이어서 눈앞에 보이는 게 별로 없어요. 깜깜한 어둠뿐이에요.
춥지만 조금만 참으면 바람도 상큼하게 느껴질 겁니다.”라고 선생님은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앞을 볼 수 없는 맹학교 어린 아이들은 찬 바람을 뚫고 들려오는 선생님의 예쁜 목소리를 뚫어져라 바라보았지요.
순간순간을 세심하게 그려내는 선생님의 목소리도 일출 속도에 맞춰 빨라졌습니다.
“ 이제는 해가 다 솟아올랐어요. 바다 끝에 살짝 닿아 있던 해의 꼬리 부분이 물 위로 떠올라서
완전히 둥근 태양이 됐어요. 아침 해는 빨간 빛이에요. 그 붉은빛이 온 바다를 핏빛으로 물들이네요.
바다를 걷어차고 튀어 오른 태양이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고 있어요. 석굴암 안쪽에는 부처님에게
동해의 붉은 햇빛을 받아 환하게 미소 지으시네요.”
라고 이어가던 선생님은 마침내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 여러분, 부처님의 저 환한 미소가 보이나요?”
선생님의 질문에 시각장애인 아이들은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일제히 ‘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때의 느낌을 저는 머릿글에 이렇게 썼습니다.
〈 단 한 마디, ‘네!’ 천둥이고, 벼락이었다. 갑자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고, 가슴 깊은 밑바닥에서
큼지막한 덩어리가 경주 석굴암을 향해 솟아오른 동해의 태양처럼 목 줄기를 타고 불끈 솟아올랐다.
눈물을 흘렸는지도 모른다. 쏟아냈을지도 모른다. 볼 수 없는 아이들에게 세상의 풍경을 보여주기 위해
숨 가쁘게 말로 풍경을 그려내던 한 선생님의 가냘픈 안간힘이 놀라웠고, 말로 그려낸 선생님의 풍경화에
집중하느라 찬 바람에 맞서 움츠리고 앉아 있던 시각장애인 아이들의 집중력이 서러워서였을 게다.
아이들은 분명히 선생님이 말로 그려낸 풍경을 본 것이다. 결코 거짓으로 대답하지 않았을 천진난만한
아이들이었다는 것도 감동의 깊이를 더해주었다. 〉
십 년도 더 된 오래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 느낌을 가슴 깊이 간직했습니다.
언어로 이룬 선생님의 간절한 그림에 응답한 아이들의 외침! 그걸 나도 하고 싶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 땅의 글쟁이로서 내가 꼭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 건 그때부터였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일이 바로 이번 프로젝트였고, 이 책 《슈베르트와 나무》가 세상에 나오게 된 계기였습니다.
그 사정을 모두 말씀드리기에 [나무편지]는 턱없이 짧습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한번 책을 권해드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나무편지]에서는 어떻게 이 터무니없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는가 하는 이야기를 책 머릿말의
일부를 인용하여 보여드렸습니다. 앞으로 이 책에서 얻은 여러 깨우침들을 덧붙여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계속적인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지난 편지와 마찬가지로 오늘 편지에서도 사진을 클릭하시거나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면 인터넷 서점의 책 페이지로 연결됩니다. 고맙습니다.
- ‘나무를 본다는 것’의 화두를 다시 일으키며, 5월 23일 아침에 ……
솔숲(http://solsup.com)에서 고규홍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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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나무생각은 평소보다 더 오랫동안 읽게 되었습니다.
특히 앞을 볼수 없는 학생들과 그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의 이야기가 특히나 긴 시간동안
마음에 오랫동안 여운으로 다가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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