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생각] 그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춤한 이름을 찾아서
깊은 숲, 그곳에 쪽동백 꽃이 한창이었습니다. 경상남도 거창의 금원산 생태수목원 숲입니다.
지난 한 주 내내 분주히 다녔습니다. 나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보다는 나무를
찾아다닌 그 동안의 일과 이야기들을 귀한 분들과 함께 나누는 자리가 있었던 때문입니다.
일요일 서울에서 시작해, 대전을 거쳐, 경남 거창에서 하룻밤을 넘기고, 비 내리던 화요일에는 비를 맞으며
거창 당산리 당송을 만났으며, 진주로 남하해 늦은 밤까지 고마운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진주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사흘 만에 돌아온 건, 깊은 밤 이른 새벽이었습니다. 즐거웠습니다.
그 숲의 깊섶에 공조팝나무의 꽃도 활짝 피었습니다. 쪽동백 꽃을 보면서 처음에 때죽나무 아닐까 했다가
함께 걷던 젊은 벗이 쪽동백이라고 알려주고서야 '아하, 맞다, 쪽동백!' 했던 때문에 공조팝나무 꽃을
보면서도 단박에 공조팝나무라고 하지 못하고, '공조팝나무 맞나?' 하며 어물거렸습니다.
'맞다' 는 이야기를 듣고서도 '품종 아니고, 기본종 공조팝나무 맞는 거지?' 라고 되물었습니다.
나무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는 일은 아직 제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비슷한 생김새의 나무들이 많기도 하지만,
겨우 열여덟 해 동안의 나무 관찰 경험만으로 나무 이름을 일일이 불러주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름을 불러주는 건 보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오래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무의 생김새와 특징을 하나하나 새겨 둘 수 있을 만큼 자세히 바라본 뒤에
그의 이름을 알아두는 게 좋다고 많은 선생님들이 말씀하십니다.
서둘러 나무의 이름을 아는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무를 제대로 안 뒤에 그의 이름을 알려 해도 늦지
않다는 거죠. 그저 이름부터 알고 오래 바라보지 않은 나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또 잊히게 마련입니다.
' 자연을 아는 것은 자연을 느끼는 것의 절반만큼도 중요하지 않다 ' 는 레이첼 카슨 선생님의
중요한 가르침도 그래서 잘 기억해 두어야 할 이야기입니다.
《슈베르트와 나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안 한번도 식물을 눈으로 본 경험이 없는 김예지씨에게
식물의 이름을 지어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살사리꽃' 이라고도 불렸던 코스모스 꽃 앞에서
그랬습니다. 꽃이 활짝 피어난 코스모스 꽃송이를 만져보는 데에서 시작했지요. 여린 꽃잎을 찬찬히
만져보던 예지씨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이런저런 이름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어서 꽃송이 아래 쪽의 줄기와
이파리를 정성껏 어루만졌습니다. 그리고 가만가만 코스모스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녀가 새로 지은 코스모스의 새 이름은 아름다웠을 뿐 아니라, 코스모스의 특징이 잘 담기기까지 했습니다.
심지어 '코스모스'라는 이름에도 연관 지을 수도 있을 법한 좋은 이름이었습니다.
이제 그녀와 나는 코스모스를 보게 되면 새로 지은 그녀의 이름을 더 먼저 떠올리게 될 겁니다.
식물도감의 이름인 코스모스보다 그녀가 새로 지은 이름을 더 많이 부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참식나무를 '적막이라는 이름의 나무' 로 부른 한 시인을 압니다.
그이는 영광 불갑사까지도 아예 ' 적막이라는 이름의 절 ' 이라고 했습니다.
불갑사라는 이름을 몰라서는 아니겠지요. 그러나 그이의 시에 가슴을 내어맡기는 동안 참식나무보다는
' 적막의 힘으로 열매를 맺는 ' 나무의 이름으로 ' 적막 ' 이 한결 뭉클하게 다가옵니다.
같은 이치로 평생 코스모스를 본 기억이 없는 그녀가 붙인 그녀만의 이름은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 나무편지 ' 에서는 어떤 계기로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는지를 알려드렸습니다. 어느 맹학교 선생님의
간절함을 닮고 싶었던 순간이 그 계기였지요. 그때 일으켰던 마음을 출중한 감각의 피아니스트 김예지씨와
지난 한해에 걸쳐 하나 둘 짚어나갔습니다. 그 동안 절대화한 감각인 시각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던 제가 얻은
깨달음은 적지 않습니다. 한 편의 ' 나무편지 ' 나 단 한 권의 책에 채 담기 어려울 만큼의 깨달음과 환희였습니다.
오랫동안 이 프로젝트를 꿈꾸었던 저로서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해도 될 만한 크기입니다.
그 적지 않은 이야기들을 담아 여러분 앞에 내놓은 게 바로 새 책 《슈베르트와 나무》입니다.
' 나무편지 ' 를 아껴주는 많은 분들의 각별한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 [나무편지]에서는 삼십 미터 가까이 되는 큰 나무를 시각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느끼려 했던 과정을
소개할까 합니다. 워낙 큰 그 나무는 손으로 채 만져볼 수 없으니, 촉각으로 느끼는 건 애시당초 기대할 수
없습니다. 또 나무가 드리운 그늘이 넓은 까닭에 향기도 감지하기 쉽지 않습니다. 후각으로서의 감지도
어렵다는 이야기죠. 청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변의 다른 소음을 배제할 수 없으니까요.
그러나 감각보다 더 중요한 건, 다른 데에 있었습니다. 다음 ' 나무편지 ' 에 그 사연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오늘 편지에 포함한 사진에도 인터넷 서점의 책 페이지를 링크했습니다. 계속적인 관심과 성원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을 생각하며, 5월 30일 아침에 ……
솔숲(http://solsup.com)에서 고규홍 올림.
움짤출처 http://blog.naver.com/hyamc/220369391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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