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찾아서] 사람은 떠났지만 홀로 긴 세월을 살아 남은 큰 나무
[2013. 3. 18]
"사람은 떠나도 나무는 남는다!" 나무를 찾아다니면서, 가장 많이 일으켜 세우는 화두입니다. 그런 까닭에 제가 나무 이야기를
하면서 가장 자주 쓰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천년을 사는 나무 곁에 그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삶은
나무에 비해 터무니없이 짧습니다. 결국 나무 곁에서 태어나 나무 그늘에 들어 살던 사람은 나무를 바라보며 나무 곁을 떠납니다.
나무는 말 없이 제 곁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많은 생명들의 들고남을 가만히 바라만 봅니다.
까닭에 나무를 찾아다니는 일에는 적잖은 그리움과 슬픔이 수반됩니다. 나무 이야기를 수굿이 들려주시던 노인을 다시 찾아뵈었을 때, 그 분의 건강이 급격히 쇠약해져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 하시거나 혹은 앓아 누우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다시 찾아 뵈옵기로 약속을 드리고 약속보다는 긴 세월을 지나 다시 찾아뵈었을 때, 이미 이 세상을 떠나신 경우도 있습니다.
고작해야 제가 나무를 찾아다닌 게 15년밖에 안 되지만, 그 사이에 그런 일은 적잖이 있었습니다. 우리네 시골 마을, 나무 곁을
지키며 살아가시는 분들이 대부분 삶과 죽음의 경계를 살아가시는 노인들이어서 더 그럴 겁니다.
소나무를 이야기할라치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나무라고 칭송할 수밖에 없는 경남 합천 화양리 소나무를 찾아갔던 지난 가을에도 그랬습니다. 화양리 소나무를 생각하면 나무보다 먼저 떠오르는 게 나무 곁으로 펼쳐진 다락논의 가을 풍경입니다. 고작 일곱 가구가 모여 사는 작고 깊은 산골의 동화같은 마을, 그 앞으로 펼쳐진 다락논의 가을 갈무리 즈음 풍경은 잊을 수 없습니다.
화양리 소나무는 바로 그 아름다운 다락논과 마을의 경계 부분을 이루는 비탈에 우뚝 서 있습니다. 더 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합천 묘산면 화양리 나곡마을 풍경입니다.
다락논의 벼 이삭이 노랗게 익어가는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입니다. 그래서 지난 가을에도 일부러 벼 익을 무렵을 기다려 찾아갔습니다. 갈무리가 끝나지 않았기를 바랐지요. 그런데 화양리 나곡마을 현장에 도착해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노랗게 익은 벼가 살랑살랑 춤추어야 할 다락논은 묵정밭이 돼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손길을 완전히 벗어난 채 버려진 논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연히 그 아름답던 풍경은 볼 수 없게 됐고, 그 바람에 나무까지 쓸쓸해 보였습니다.
처음엔 그냥 나무만 바라보다가 나무 바로 옆에 있는 오두막에 찾아들었습니다. 이곳에서 60년 넘게 살아오신 거창댁 할머니가
마침 마당에 나와 앉아계셨습니다. 올해 여든 다섯 되신 분입니다. "저 예쁜 다락논이 왜 묵정밭이 됐느냐?" 부터 여쭈었지요.
거창댁 할머니의 이야기는 뜻밖이었습니다. 그 논에서 농사를 짓던 배용수 아저씨가 이태 전에 돌아가셨다는 겁니다. 그 때 배씨
아저씨는 칠순을 조금 넘긴 나이로, 이 마을에서는 가장 젊은 분이었는데, 안타깝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착하고, 부지런한 분이라는 말씀도 빼놓지 않으셨지요.
논을 일구던 배용수 아저씨가 돌아가신 건, 이 마을의 특수성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 해 가을 배씨 아저씨는 논 가장자리에서
경운기에 치어 쓰러지셨습니다. 하지만 마을에서는 누구도 그 분이 사고를 당한지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워낙 사람이 많지 않은
조용한 마을이기도 하지만, 그 날 따라 마을 노인들이 모두 읍내에 장보러 나간 길이었다고 합니다. 결국 배씨 아저씨는 사고를
당한 채 홀로 신음하다가 뒤늦게 마을 사람들에게 발견됐고, 부랴부랴 병원으로 옮겼지만,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조금이라도 일찍 사고를 발견해 응급조치를 취했다면 최소한 목숨만큼은 건질 수 있었던 상황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아쉬움 끝에 "저 논은 그러면 이태동안 저렇게 버려둔 것이냐?" 는 질문에 할머니는 "여기서는 농사 짓기가 어려워" 라고 답하셨습니다. 이유는 멧돼지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농사를 열심히 지어도 멧돼지가 하룻밤에 논밭을 완전히 망쳐놓기 때문에 아예
농사를 지을 염을 내지 못한다는 겁니다. 지금 이 마을에 살아계신 노인들이야 당장 먹을거리 만큼만 마지못해 농사를 짓는 거지요. 당연히 농사를 짓던 배씨 아저씨가 돌아가신 뒤에 그 자리는 묵정밭으로 내버려 둘 수밖에 없는 겁니다.
모두 해야 일곱 가구밖에 안 되는 작은 마을이고, 그나마 노인들만 계신 마을이어서, 마을은 언제라도 고요하고, 평화롭습니다.
허투루 하는 말이 아니고, 실제로 마을의 일곱 가구 노인들은 그야말로 평화공동체처럼 살아갑니다. 거창댁 할머니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바로 옆 집의 다른 한동댁 아주머니가 찾아오셔서, 밭에 나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주섬주섬 몇 가지 기구를 챙겨서 거창댁 할머니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셨습니다. 건너집 할머니의 밭 일에 함께 나서신 겁니다. 이 마을에서는 이렇게 네 일
내 일이 따로 없습니다. 집안 일도 밭일도 모두 함께 하는 ‘나의 일’로 여깁니다.
전방 하나 없는 이 작은 마을에서 생필품을 구하려면 읍내에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워낙 깊은 산골이어서, 버스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을 노인들은 서로의 일정을 맞추어서 한꺼번에 읍에 나가시지요. 마치 소풍을 닮은 마을 행사입니다. 일정이 맞춰지면, 할머니들은 전화로 택시를 부릅니다. 네 명이 타야 할 택시에 때로는 여섯 분이 함께 타기도 합니다. 규칙에 어긋나는 일인 걸 모르지 않지만, 한 푼이 아쉬운 노인들의 살림살이에서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읍내 택시 기사님도 그 정도는 충분히 양해하는 일입니다.
이 나곡마을에서 지금 가장 젊은 분은 올해 일흔 여섯 된 백운기 아저씨입니다. 다른 곳에서라면 노인이라고 해도 좋겠지만, 이 마을에서야 ‘청년’ 취급을 받는 분이지요. 백씨 아저씨는 화양리 소나무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천천히 들려주셨습니다. 마을을 지켜주는 매우 고마운 나무라고 이야기를 시작한 백씨 아저씨는 한국전쟁 때 이 마을 청년들도 전쟁터에 나갔는데, 모두가 나무 앞에 정한수를 떠 올리고 무사 귀환을 빌고 떠났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났을 때에 마을 청년들 모두가 부상자 한 명 없이 건강하게 돌아온 것도 모두 나무 덕이라고 합니다. 고맙게도 나무가 마을을 지켜준 이야기는 또 있습니다. 십 년 쯤 전에는 마을 아래 쪽에서 큰 산불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마을로 들어서는 산길은 매우 비좁은데다, 오로지 외길이어서, 피할 방법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고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곡마을을 직접 가보신 분들은 그 상황이 얼마나 절박했을지 짐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걷잡을 수 없이 치솟던 산불은 산모롱이를 돌아들며, 바로 우리의 화양리 소나무가 바라다보이는 쪽으로 다가오더니, 일순간에 불길이 잠잠해지고 더 이상 불이 번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불이 저절로 잦아들지 않았다면 나곡마을에 닥칠 화가 얼마나 치명적이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그 모두가 바로 신령스러운 소나무가 마을을 지켜준 때문이라는 게 아저씨의 생각입니다. 그 이야기를 곁에서 들으시던 마을 할머니들도 ‘그렇고 말고’ 라며 맞장구를 치십니다.
화양리 소나무는 바라보기만 해도 좋은 매우 훌륭한 생김새의 소나무입니다. 키가 18미터 쯤 되는 나무는 땅에서 힘차게 솟아오른 굵은 줄기가 3미터 쯤 되는 자리에서 세 개의 굵은 줄기로 갈라졌고, 각각은 다시 작은 가지들이 고르게 나눠지며 퍼졌습니다. 사방으로 고르게 펼친 가지들은 그 길이가 사방 20미터를 훨씬 넘습니다. 정확히 하자면 동서 방향으로 25미터, 남북 방향으로는 23미터나 됩니다. 곧게 솟아오른 줄기나 사방으로 펼친 나뭇가지가 전체적으로 균형을 잃지 않고 고르게 퍼진 더 없이 아름다운 소나무입니다.
나무 줄기 표면의 조형미도 빼어납니다. 이 나무도 여느 소나무와 마찬가지로 줄기 표면이 거북 등처럼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갈라졌습니다. 거기에 나무가 마치 승천을 앞둔 용이 웅크리고 있는 형상이라 해서 예전부터 사람들은 이 나무를 구룡목(龜龍木)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훌륭한 화양리 소나무의 나이는 500살에서 700살 정도 된 것으로 보지만 전하는 기록이 없어서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사백 여 년 전인 조선 광해군 때 이야기가 전할 뿐입니다.
광해군 때 피바람을 불러왔던 역모, 이른바 "칠서지옥(七庶之獄)" 이라 부르는 사건에 연루된 이야기입니다. 선조의 둘째 아들이지만, 후궁의 자식으로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늘 자신의 위치에 위협을 받았지요. 선조의 두번째 왕비인 인목대비에게서 태어난 영창대군과 그를 따르는 세력을 경계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광해군은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의 아버지 연흥부원군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추대하려고 역모를 꾸민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근거 없는 모함이었지만, 광해군으로서는 위협으로 받아들일 사건이었지요.
마침내 광해군은 김제남을 처형하고, 인목대비는 서궁으로 유폐했으며, 어린 영창대군은 죽음으로 몰아냈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광해군은 인목대비 쪽의 친척들을 샅샅이 찾아내 처형했지요. 그때 조정의 피바람을 피해 바로 이 나곡마을로 찾아든 김규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의 육촌 형제였지요. 그는 이곳을 지나는 길에 큰 나무 그늘에 들어 다리쉼을 하다가, 아예 이곳에 자리를 잡고 보금자리를 틀었습니다. 지금의 나곡마을이 처음 만들어진 이야기로, 그때 그 큰 나무가 바로 지금의 화양리 소나무라는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나무 편지가 무척 길어졌습니다. 편안히 보셔야 할 나무 편지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풀어놓았습니다. 그래도 워낙 할 이야기가 많은 나무여서 아쉬움이 남습니다만, 다음 기회로 넘기고 이만 줄여야겠네요. 사백 년 전 무고한 선비도 떠나갔고, 아름다운 다락논을 일구던 노인도 이미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 모든 걸 바라본 나무만이 홀로 남아 오랫동안 지켜준 사람들의 이야기였습니다.
고맙습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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